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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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봉의산성

봉의산성을 노래한 성현

<동국여지승람> 춘천부 누정조에 봉의루(鳳儀樓) 절구가 실려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이 봉의루를 찾아 감회를 적은 것이다.

성현은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文臣)·학자. 호는 용재(慵齋). 세조 8(1462)년 문과(文科)에 급제, 대사간·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예악(禮樂)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고 정치·사회·제도면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지었다. 저서 <허백당집(虛白堂集)> <보집(補集)>이 있다.

 

봉의루(鳳儀樓) 

전략(前略)

봉산이 천 길이나 높이 치솟고 

凰岳高騫起千仞

긴 강이 필련처럼 그 앞으로 흐르누나 

長河匹練流其前

내가 오늘 이 강변에 와서 

我來今日到江上

만상을 거두어서 시를 읊노라니 

收拾萬像歸吟鞭

무창의 버들은 서편 물가에 어둑어둑 

武昌楊柳暗西渚

중략(中略)

고금의 몇 영웅이 예 올라와 바라본고 

英雄古今幾登眺

이별 연의 풍악 소리 급한 가락 재촉하는데 

離筵急管催繁絃

계산의 은은한 달은 아침 저녁 그대로라 

溪山煙月自朝暮

사람은 옛사람 아니요 해도 옛 해 아니로세 

人非昔人年非年

큰 둑의 소녀들이 ‘낙매화’를 노래하니 

大堤兒女歌落梅

길 가는 몇 사람의 회포를 야기하네 

惹起多少行人懷

동풍이 불어 비를 불어 날리니 

東風澹蕩吹飛雨

낙화가 송이송이 이끼 속에 묻히누나 

落花點點埋荒苔

꽃 지고 이끼 닳고 우는 새도 흩어지니 

花殘苔老啼鳥散

봄빛이 한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랴 

春光一去何時迴

구태여 옥해주라야 시름을 씻어 낼까 

澆愁不用玉薤酒

술 있으면 그만, 유하배는 무엇하리 

有酒不必流霞杯

흐르는 강물은 출렁출렁 돌은 뾰죽뾰죽 

江流漾漾石鑿鑿

소양강 어디에 먼지가 있는가 

昭陽何處迷纖埃

하략(下略)

 

거란과 몽고 격전지 

봉의산성은 글안과 몽고 침입 때 격전장으로 많은 관군과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고려사절요> 권15를 보면 “거란족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 이 이 성에서 백성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종 4(1217)년 기록). 

몽고족의 4차 침입 때(고종 40(1253)년)는 춘천부 주민들이 성에 들어가 항거했으나 모두 도륙되는 비극을 맞았다. 백성들은 몽고병의 포위가 오래되자 식수가 없어 소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셨다. 관원 조효립은 처와 함께 불길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몽고군의 4차 춘주성 침입은 <고려사절요> 고종 40년 9월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몽골병사는 춘주성(봉의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2중으로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한 길이 넘는 구덩이를 파 놓고 여러 날 공격하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 피를 마셨으며 사졸들은 매우 피곤하였다. 

이때 벼슬이 문학이던 조효립은 성(城)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먼저 성안의 전곡을 불살라 버리고 결사대를 이끌고 목책을 무너뜨려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구덩이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한 사람도 탈출한 자가 없었다. 끝내 성이 도륙되었다. 안찰사 박천기는 결사대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몽고군은 봉의산성을 함락하고 성안에 있던 백성들도 모조리 도륙했다.

<고려사> 열전19, 박항(朴恒. 1227~1281)은 춘천에서 몽고난을 겪으면서 부모를 잃었다. 몽고군이 춘천을 함락시킬 때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으로 끌려갔다. 박항은 어머니를 두 번이나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박항전에 당시 많은 백성들이 도륙된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아, 부모로 의심되는 시신만 300여 명을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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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자문 적색 와편

국난극복 유적 사적 지정을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유적연구원의 춘천지역 답사 과정에서 중요한 고구려 금석문과 와편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와편은 적색으로 전형적인 사격자문을 보이고 있다. 이 와편은 고구려 유적인 고양시 고봉산, 김포 비사성(문수산성) 유적에서 수습된 와편과 매우 닮아있다. 

특히 축성법이 전형적인 고구려식임을 확인한 것도 수확이다. 축성에 쓰인 돌들은 장방형의 큰 돌로 벽돌처럼 다듬어 들여쌓기로 축성한 것이다. 답사반은 성벽이 영월 조양산성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봉의산은 원래 ‘봉산(鳳山)’이었다. ‘봉(鳳)’은 신(神)의 새이며 백조중(百鳥中) 왕(王)으로 날개가 미려한 새다. 그것이 제사(儀)와 관련 봉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산 정상에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낸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답사반이 확인한 정상 부위 암반군의 명문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이 일대가 천제를 지낸 신단 유적이며 고구려왕이 행행 진주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봉의산은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춘천 고대 역사 ‘맥국’ 고구려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 모르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당국이 맥국 찾기에 대한 열의가 있으면서도 봉의산을 주목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현재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나 국가 사적으로 격상돼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글안과 몽고 침입 때 이 성에서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성을 사수하다 관군과 백성들이 수없이 전사했다. 강인한 민족정신을 발휘한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봉의산이 너무 푸대접받는 것은 아닌지. 잔설이 남은 계곡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찬 겨울을 이긴 인동초 새싹이 힘겹게 돋아나고 있었다. 인동초는 고구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아름다운 덩굴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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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자문 회색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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