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와편 ‘麻山傐子瓦草(마산호자와초)’ 명문와
고구려 지배계급 의미…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증
옥수수 알갱이 같은 석축 전형적 고구려 축성
신라문무왕대 1년 축성 삼국사기 기록 뒤집어
우리 역사상 최장의 대성… 자랑스러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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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장대 성벽의 장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는 축성술이 고구려식이다. ⓒ천지일보 2023.02.01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조선 인조 때 청나라군에 항복한 역사적인 슬픔을 담고 있는 유적이다. 학계는 이 성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672)년조에 기록된 주장성(晝長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전 충청북도문화재 위원) 고문이 역사•문화잡지 월간 글마루 2월호 특집에 이 성을 고구려 축성이라는 주장을 펴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역사유적연구원과 글마루 취재반은 지난 2019년부터 만 4년 동안 남한지역 내 47개의 고구려 산성을 조사해 매월 글마루에 답사기록을 단독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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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출토 적색 사격자문 와편 ⓒ천지일보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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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출토 정격자문 와편 ⓒ천지일보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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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토 적색 사격자문 평와 ⓒ천지일보 2023.02.01

이번 글마루 2월호 특집에서 조사단을 대표한 이재준 고문은 성안 여러 곳에서 주목할 만한 고구려계 적색 와편을 수습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고문은 “와편은 만주 요녕성 일대의 고구려 산성 유적과 임진강 일대 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적색 와편과 너무나 닮아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연한 사격자문의 이 평 와편은 태토가 고우며 모래가 많이 섞이지 않았다. 흡사 김포 문수산성, 고양시 고봉산성, 포천 반월성, 연천 고모루성 등 고구려 성지에서 찾은 사격자문과 흡사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평양 근교 출토의 격자문 적색 평와를 닮고 있다.

또 서편 성지에서는 ‘진(辰)’자명 명문 평와를 수습했다. 큰 글씨로 해서 양출한 ‘진’자명 와편은 발해지역에서 수습된 명문와 글씨를 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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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은 와편에 새겨진 글자를 ‘麻山傐子瓦草(마산호자와초)’로 해석하고 있다. 붉은색 원 안에 있는 글자를 ‘停(정)’자가 아닌 ‘호(傐)’자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천지일보 2023.02.01

이 고문은 “이 기와는 연호를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용(龍) 즉 제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발굴한 제일 중요한 명문 와편 가운데 국내 학자들이 해석을 잘못한 부분을 밝혀냈다”고 쓰고 있다. 즉 기와 가운데 ‘麻山停子瓦草(마산정자와초)’는 ‘麻山傐子瓦草(마산호자와초)’를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마산정자’는 ‘麻山傐子瓦草’를 잘못 읽은 것이며 ‘停(정)’자가 아니라 ‘호(傐)’자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우선 마산(麻山)이라는 지명부터 상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마산은 남한산성 주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명이다. 중국 ‘백도(百度)’ 자료에 따르면 ‘마산’은 중국 흑룡강성 계서시 마산구의 고지명으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구려 건국설화에 의하면 ‘건국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이고 (중략) 마산(麻山)에서 자리를 잡았다’라는 기록이 있다”며 “고구려 창업의 성지이면서 고구려민족과 말갈족이 주류를 이루고 살았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적색의 수키와에 정서 양출한 ‘甲辰城年末村主敏亮(갑진성년말촌주민량)’ 명문와는 문무왕대 축성을 담당한 신라 촌주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중국 측의 마산구 역사를 보면 이곳이 나중에 여진 흑수말갈의 땅이 됐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바이두(百度)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五代時期, 契丹人稱黑水靺鞨爲女眞, 从, 女眞这一名稱代替了靺鞨. 遼朝又因避諱改寫作女直. 遼天顯元年(926)太祖耶律阿保机灾渤海, 部分女眞人随渤海人南遷, 编入遼籍, 稱爲 “熟女眞”: 留居故地的女真人.

그다음 ‘傐子’에 대한 이 고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중국 ‘강희자전’을 보면 ‘傐(hào)’자를 중국 북방 고지명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직예진정부 마을로서 즉 고읍을 통칭하지만 편해(篇海)에는 그 근거를 모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按今直隸眞定府有鄗. 卽高邑. 陝中有鎬滈. 無傐. <篇海> 不知何據).” 

이 고문은 ‘자(子)’는 작위를 나타낸 글자라고 말한다. 고려시대에도 ‘子(자)’는 봉작(封爵)의 등급으로서 4등급에 해당하는 작위로 쓰였다고 한다. 봉작제(封爵制)는 크게 왕으로 봉해주는 왕작(王爵)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작(五等爵)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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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장대 치성(雉城)이 잘 보존돼 있다. ⓒ천지일보 2023.02.01

이 고문이 남한산성을 고구려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바로 석축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는 축성술이 고구려식이라고 설명한다. 남한산성은 총 12㎞를 화강암 등 석재를 옥수수처럼 다듬어 정연하게 구축했다. 처음 축조 당시의 장엄함이 보이는 독특한 남장대 아래의 치성(雉城)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석축은 고구려 오녀산성(五女山城,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도산성(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그리고 왕도였던 국내성(1930년도 자료), 길림성 나통산성의 축성을 방불한다. 오녀산성의 곡성은 남한산성 동문의 곡성과 너무도 닮아있다. 또한 고구려 지역의 석축보다 더 정교하고 단단하게 그리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고문은 “통일신라도 고구려 축성술을 응용해 성을 구축하지만 고구려의 정연한 치석과 위용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신라 축성인 보은 삼년산성의 축성은 돌을 다듬은 정교함이 떨어진다”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이 고문은 “남한산성 행궁지는 여러 차례 발굴이 있었지만 고구려 역사에 대한 해석과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 박물관 창고에 쌓아둔 와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앞서야 한다. 계제에 한성백재 시기 축조한 남한산성 내 판축성에 대한 실측과 발굴도 함께 이뤄졌으면 한다”고 부연했다.

이 고문은 끝으로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 현장이 아니다. 대륙을 제패했던 대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는 유적”이라며 “2천년 한국 고대사를 대표하는 석축산성으로 민족의 지혜가 응집된 자랑스러운 역사적 유물로 재인식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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