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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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이 말은 일본인들이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고 부른 데서 기인했다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이 왕도 경주에 와서 무덤을 파기만 하면 나오는 것이 금, 은 제 유물이었으므로 이 같은 말을 지어낸 것이다.

일본 오사카 성덕태자 신사 박물관에 가면 뜻밖에 신라인들이 입고 다녔던 직금 비단 천을 구경할 수 있다. 신라 때 일본 왕실에 보낸 비단 옷이 천 조각으로 남은 것이다.

비단에 한 올 한 올 금사를 섞어 수를 놓은 것인데 요즈음 생산품보다도 더 선명하고 아름답다. 신라 직조기술과 여인들의 섬세한 수공예 솜씨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일본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흠모는 바로 이런 놀라운 황금응용기술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골동 수집 상인들은 도굴꾼들을 동원, 유적을 마구 파헤쳐 쓸 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다. 다행히 경주 왕릉 급은 적석분이어서 무너진 왕릉을 도굴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므로 이를 막을 수 있었다.

경주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출자형 금관 등은 이래서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골의 고분, 도요지 등은 많이 도굴 당했다.

지방의 수장급 관리들이 착용했던 금동제 관, 곡옥, 금제 장식, 철제 갑주들이 도굴로 도난당한 것이다. 이런 귀중한 문화재들이 일본의 대소 컬렉션이나 수장가의 집에서 많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금의 산출이 적은 나라였다. 고대의 금은 대부분 금광에서 캐지 못하고 사금을 채취, 왕실에 진공한 것들이다. 나라에서도 민간의 사금 채취를 강제로 막았다. 그리고 서민들은 금제 용구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신라시대의 사금 채취는 지금의 경주시를 흐르는 월성천이었다. 수년 전 한 방송이 신라 왕궁이 있던 경북 경주 소재 월성천 인근에서 동글동글한 모양의 구상 황금이 다량 발견됐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구상사금의 순도는 70~80%로 일반사금 20%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황금의 나라’로 불리는 신라의 사금 채취 비밀이 풀렸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금이 많이 난다는 말을 들은 오랑캐 황제들은 매년 금을 공물로 바치도록 강요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려, 조선 왕실은 전전긍긍해 금의 산출이 적으니 줄여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고려 왕실에 황금으로 쓴 불경이나 금니로 그린 불화까지 진공하라고 강요했다. 고려 왕실에서는 최고의 화사를 불러 정성을 들여 금니로 불화를 그려 사신 편에 들려 조공했다.

그런데 이같이 전해진 최고의 불화는 지금 중국이나 몽골에서 한 점도 찾을 수 없다. 고려 때 그려진 세계적인 미술품들은 일본인들이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대체 이 그림들이 어떻게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일까. 임진전쟁에서도 그랬지만 한반도와 대륙강점이 문화침탈을 위한 공략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 국가와 은행 경제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황금 사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물가가 오르고 금리가 치솟자 황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에서인가.

중국, 러시아를 위시한 여러 국가마저 금사재기 열풍에 빠져있다. 하반기에도 세계경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데 대한 대응책이라고 한다.

우리 국민들은 IMF 당시 금모으기로 난국을 극복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국민들이다. 세계 경제 불안 속에 물가 억지 등 국민들의 생활이 안정되도록 정부는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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