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성’ 주장도… 북상하는 세력 방어가 목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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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성 지도

불암산성은 고구려 매성군 땅

서울 노원구 불암산성(佛巖山城)은 본래 경기도 양주목에 속한 땅이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양주는 고구려 시기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고 불렸다. 신라 삼국 통일 후에는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쳐 부르고 고려 초에는 견주(見州)라고 했다. 

‘내소’라는 지명은 경기도, 충남도 등 서해 지역 여러 곳에서도 찾아진다. 삼국기말 백제 멸망 당시 한반도에 파병된 소정방이 왔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지역도 대당(對唐) 전쟁 당시 한때는 당나라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인가.

<삼국사기> 권37 지리지에도 양주를 ‘매성군(買省郡)’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35 지리2 신라 한주 내소군조 및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0 문무왕 8년 인용 부분에서는 ‘매성현’이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매성군을 매성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양주는 포천과 지근거리에 있다. <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마홀(馬忽) 지역이었던 포천 경계까지 25리이고, 현(縣) 경계까지는 22리가 된다고 했다. 인근 가평현 경계까지는 29리로 기록된다. 일단 유사시 군대를 이동하여 지원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아차산이 있는 서울 광나루까지는 56리 하루길 거리이다. 

주 동쪽 50리에 있던 풍양현은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다. 신라에서 황양(黃壤)이라고 고쳤다. 고구려식 지명이 남아있는 곳이다. ‘골의노’는 무슨 뜻일까. 언어학자들은 ‘큰 고을’ 또는 ‘비옥한 고을’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 지역은 서울 근교의 퇴계원(退溪院) 북쪽의 넓은 평야 지역에 있어 예로부터 농작물의 생산이 많았다. 왕산천(王山川)을 따라 올라가면 광릉(光陵)에 이른다. 부근에는 쌍수역(雙樹驛)이 있어 남쪽으로는 퇴계원, 북쪽으로는 포천(抱川)과 이어졌다. 

불암산성은 불암산에 있는 석축성이다. 서울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이며 고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성을 신라 소축으로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양주시가 이 성의 사적지정을 추진하면서도 삼국시대 성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유적연구원은 이 성의 현장을 답사하기로 했다. 벽돌처럼 정연하게 다듬은 장방형의 돌로 구축한 석축은 만주일대 요녕성 혹은 평양 인근에 있는 고구려 성의 축성을 닮고 있는 것이다. 과연 불암산성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입춘이 지난 2월 11일 혹한기 답사반은 불암산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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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토루

불암사 연유로 지어진 ‘불암산성’

‘불암산성’이란 이름은 바로 불암산에 구축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의 성 이름은 아닐 것이다. 불암산은 <여지승람> 제11권 양주목조 산천조에 ‘불암산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고 나온다. 삼각산, 도봉산 불암산 3개의 명산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분인 이색(李穡)도 풍경을 감탄하여 <삼령삽천(三嶺挿天)>이란 시를 지었다. 

깎아지른 듯한 세 영(嶺)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가네

 

불암산에 있는 불암사는 유명한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명찰(名刹)이다. 조선 초 문호 서거정(徐居正)은 <여지승람>에 <불암사> 시를 남기고 있다. 중국 고대 문사들의 얘기를 담은 것이어서 조금은 난해하다. 

우리 집 서쪽 영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함께 손잡고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籟. 솔바람)소리

두릉(杜陵. 중국 고대 풍수에 밝은 사람)이 잤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티끌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또 한 수를 지었는데 불암산과 불암사의 정경을 예찬했다.

천불산 높게 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을 쓸고

스님은 예불하며 종을 울린다.

산에 오르니 동남쪽이 다 보인다. 

하늘 땅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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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처럼 장방형의 돌을 다듬어 들여쌓기로 축성했다.

불암사 창건 역사

불암사 소재지는 노원구가 아니고 남양주시다. 천보산 불암사사적비(天寶山佛巖寺事蹟碑)에 보면 ‘824(헌덕왕 16)년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으켰던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하였고 도선(道詵)이 중창하였으며 무학(無學)이 삼창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뒤 조선 성종 때 중건하였고 1782(정조 6)년 서악(西岳)이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霽月樓)를 다른 곳으로부터 이건하였다. 1855(철종 6)년에 보성(寶性)·춘봉(春峯)·혜월(慧月) 등이 중수하였으며, 1910년 독성각·산신각·동축당(東竺堂)이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제월루·관음전·칠성각·경판고(經板庫)·일주문·요사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 212매의 목판이 있다. 1638(인조 16)년에 왕명으로 역대 승려의 법통을 이어온 것을 판각한 것으로 고창 선운사(禪雲寺)와 이 절에만 보존되어 있는 귀중본이다. 이 밖에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379매의 경판 중 언해판 4종이 포함되어 있다.

서울근교 사대명찰 중의 하나로 세조 때 왕성 사방에 왕실의 원찰(願刹)을 하나씩 정할 때 동불암(東佛巖)으로 꼽히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불암산성은 고구려 보루성?

불암산성은 불암산 제2봉(420.3m) 정상 부위에 있는 테메식 산성으로 평면은 원형에 가까운 5각 형태다. 성 전체 둘레는 236m, 성 내부 면적은 약 5321㎡(약 1600평)로 작은 규모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서울의 성곽>이라는 책 ‘불암산성 편’을 보면 성벽의 둘레는 257m, 내부면적 700평정도로 규모가 매우 협소하여 산성이라기보다 보루(堡壘)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산성 축조 이전에도 사람들이 기거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적색 토기편이 수습된 것이다. 청동기인들의 주거 유적이나 백제 초기 유적으로도 판단된다. 글마루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답사에서도 적색토기 편이 수습되었다. 

필자는 이 산성의 초축 시기를 인근의 상계동보루, 봉화산보루, 아차산 보루군, 홍련봉보루의 연장선 상에서 볼 때 고구려 보루군의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노원구가 다른 지자체보다 더 열성적으로 불암산성 복원에 노력하고 있다. 구청은 불암산성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2017년 시굴 후 2018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또 2018년 북벽과 추정 북문지에 대한 1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9년 동벽 및 정상부 목곽고에 대한 2차 발굴조사, 2020년 남벽, 치성 및 남문지에 대한 3차 발굴조사를 완료했다.

2021년인 지난해에는 4차 발굴조사를 실시, 성 내부 시설 및 북쪽 구릉 일대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진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성벽의 축조방법은 풍화암반을 다진 후 그 위에 석축으로 성돌을 쌓았으며, 외벽과 내벽 일부는 치석한 면석을 이용하였고 내벽 안쪽으로는 흙을 이용하여 내탁하였다’고 쓰고 있다. 성벽 안쪽으로 판축된 다짐 층이 확인되는데 백제에 의해 조성된 토성이 존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해석했다. 성 안에서 확인된 집수시설은 길이 8.8m, 너비 6.6m이며 깊이는 3m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 학술대회를 개최해 불암산성이 지니는 고고·역사학적인 위상을 정립, 사적 승격에 대한 당위성을 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울러 국가사적위원회를 구성, 2025년까지 산성의 잔존 원형을 최대한 살리고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복원 및 정비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 사적 지정과 복원·정비가 완료되면 안보역사공원, 생태탐방공원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시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소로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노원구는 이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주민설명회를 개최한바 있다. 연차별 발굴조사 결과 및 향후 사적 지정 추진, 복원·정비 계획 등을 주민들에게 알려 지역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문화재 등재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 및 정책 소통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오승록 구청장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인 불암산성의 문화재 등재는 주민들의 자부심을 더욱 고취시킬 것”이라며 “문화재를 지키고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겠다”고 피력했다.

경기도 문화재연구원의 불암산성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불암산성(佛巖山城)은 경기도기념물 제22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로 175이다.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과 남양주시 별내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불암산의 남쪽 제2봉인 해발 420.3m 봉의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남양주시 일대가 잘 조망되는 곳으로 평탄한 정상부의 자연지형을 따라 석축을 쌓았는데 평면 형태는 부등변의 5각형이나 4각형에 가깝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221m이다. 성벽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나 남쪽과 동쪽의 일부 성벽에는 면석(面石)이 남아 있다. 남쪽의 성벽은 7단의 석축에 높이 120㎝정도가 남아 있으며 동쪽은 폭 15m, 높이 1.5m 정도가 남아 있다. 성 내부에는 남북 28m, 동서 26.5m로 전체 둘레가 78m에 달하는 하단보다 약 3m 높은 지점이 있다. 이곳에는 북쪽으로 치우친 직경 8m 내외에 둘레 26.8m인 원형의 구덩이가 있는데, 현재 깊이는 약 40∼80㎝ 정도이다. 이 함몰부는 집수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곳과 경사면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무문토기류와 경질토기편이 함께 발견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무문토기는 저부편으로 전체적인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점토에 굵은 석립이 많이 혼입되어 있으며 단면 원형의 점토대토기 구연부편도 발견된다. 

그 외에 토기들은 대체로 회청색의 경질토기들인데 신라~통일신라기의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도기편도 발견되고 있다. 축성기법이나 성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의 양상을 고려할 때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신라에 의하여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이 보고서에도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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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성 석축 아래서 찾아진 고려시대 추정의 당초문 평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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