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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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에서 바라본 강화도

천험의 요새 고구려 포곡식 성

문수산성은 해발 376m의 문수산(文殊山)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이 갑곳진(甲串鎭)에 닿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날 강화부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해안 지대를 연결하고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성 형태로서 이 산성은 백제보다는 고구려가 먼저 축성했던 것으로 상정된다. 성이 있는 산은 지금도 비솔산(比率山) 혹은 비아산(比兒山), 통진산(通津山)이라고도 불려와 고구려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비아산’이 통진현의 진산(鎭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산은 대부분 유사시 백성들을 보민한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고려 고종당시 몽고군이 성을 점령하고 바다를 건너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1764(숙종 20)년에 축성했다고 했으나 무너진 석축을 대대적으로 보축했다고 할 수 있다. 축성자료에는 둘레가 5529보, 여장이 2173첩(堞)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 한사람과 군관 161인, 사병 56명, 돈군 6명, 수첩군 80명, 모입군 72명 등을 두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 말 1812(순조 12)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다는 것이다. 

문수산성은 1866(고종 3)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곳이다. 9월 7일 프랑스군의 로즈제독의 기리에르호를 기함으로 하여 포함과 해방함 및 통보함 등 7척에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이튿날 강화성을 점령하고, 18일에는 이곳 문수산성으로 침입하였다. 이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韓聖根)이 광주(廣州)의 별파군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작은 배가 성의 남문밖에 정박하였는데 한성근이 이끄는 우리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은 후퇴하였는데 포수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하였으며 1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하자 성안의 민가 29호를 불살라 버렸다. 이 격전으로 해안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모두 불탔다는 것이다. 

고구려 전형적인 치성 확인

발굴 자료를 보면 지난 1995년에 길이 16m, 너비 10m 규모의 치성(雉城)이 서남쪽 끝에서 확인되었다고 한다. 발굴당시에는 이 유구를 고구려 시기 구축으로 해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평탄지에서는 성벽이 고구려 국내성 혹은 환도산성 오녀산성에서 확인된 내외 협축 성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치성’은 어떤 형태를 가리키는가. 서길수 교수의 치성(雉城 ‘고구려 축성법연구’. <고구려 연구> 제12집, 2001)에 대한 설명을 알아본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死角)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밖에 공격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벽에서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하고, 전투를 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 즉 3면에서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내 쌓은 것이 치(雉, 또는 雉城)이다. 

치성은 간단히 치(雉)라고도 하는데 꿩 ‘치(雉)’자를 쓰는 것은 꿩이 몸을 감추고 적을 잘 엿보는 데서 온 말이라고 한다. 대개 각(角)을 이루고 있는 것을 치성(雉城), 둥근 것을 곡성(曲城)이라 한다. 남한 지역 대부분의 고구려 성지를 답사해 보면 어디든 빠짐없이 ‘치성’의 유구가 확인된다. 치성구조가 가장 뚜렷한 성지는 포천 반월성이다. 가장 많은 치성이 조사 된 것은 글마루 지난 10월호에 연재 된 강화 삼랑성(三郎城)이다. 

이 유적의 치는 흡사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환도산성의 구조를 방불하고 있다. 포곡식 산성인 삼랑성은 전장이 2㎞나 되는 장성으로 문수산성을 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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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장대지에서 수습된 고구려 와편(사격자문 와편)

성안에 뒹구는 고구려 흔적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는 10월 초 가을비가 내리는 날 문수산성을 답사했다. 단풍이 막 시작되고 있는 계절이지만 문수산성의 수목은 연한 녹색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 학자 민유(閔愉)는 권신 신돈의 정치에 혐오를 느껴 통진으로 내려와 살았다. 함께 낙향한 친구 학사 주사옹(朱士雍)과 탁주를 벗 삼아 살았다고 한다. 

가을이 가고 와서 흥이 한이 없다

향긋한 벼 살찐 고기 곳마다 같다

배 불룩한 질병에 막걸리 담고 

남촌 첨지와 북촌 첨지가 마주했네

 

익어가는 가을 노란색 옷으로 갈아입은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양인가. 비록 조선시대 대대적인 수축이었지만 성의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전장 2.4㎞ 규모라면 대단히 큰 성이다. 포곡식으로 쌓은 거대한 비사성은 해항도시로 많은 고구려인들이 주거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성벽 가운데 일부 구간은 고구려 시기 축조한 정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들여쌓기로 축조한 것이다. 조선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축하면서 많은 구간은 옛 모습을 살려놓았다. 강화 삼랑성처럼 고구려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답사반은 북문에서 부터 정상을 향해 성벽을 올라가면서 와편을 조사했다. 분명 이 성에서는 고구려 흔적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성 주위를 답사했다. 

삼국시대 전형 적인 판축이 지속되며 바깥은 고준하게 석축으로 보강했다. 북문과 가까운 곳은 근년에 보축한 것이다. 기대대로 성안 장대지 주변에서 많은 적색 와편을 수습했다. 삼국시대 토기편도 수습된다. 

정격자문(正格子紋), 사격자문(斜格子紋) 그리고 횡선문(橫線紋), 태조선조문(太彫線條紋) 등 와편이 조사됐다. 와편들은 아차산성, 고양시 고봉산성, 호로고루성 유적 등에서 출토된 와편을 닮고 있다. 특히 적색의 전(塼)이 다수 확인됐다. 전을 깔았다면 장대지는 매우 중요한 건물지로 추정된다. 

최맹식의 <삼국시대 평기와 연구(주류성 2006.5)> 184쪽에는 문수산성 평기와를 닮은 중국 용담산성(龍潭山城. 중국 길림성), 영성자 해성(英城子 海城. 중국 요령성), 성자산성(城子山城. 중국 요령성)의 와편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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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장대지에서 수습된 고구려 와편(사선조문)

발굴에서 드러난 고구려 철제마 

2009년경 발굴 조사에서는 장대지(將臺地)에서 뜻밖에 고대 유물이 확인되었다. 바로 철제마(鐵製馬), 도제마(陶製馬) 등이다. 이 같은 유물은 한반도 여러 곳의 고대 성지에서 다수 출토된 바 있다. 장대지가 고구려 당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이 아닌가 추정된다. 

특히 철제마는 서울 아차산성, 포천 반월산성, 화성 당성, 이천 설봉산성, 광양 마로산성 등 고구려 제사 유적에서 많이 확인된 유물이다. 백제 초축이지만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이용한 하남 이성산성에서도 철제마가 출토되었다. 

지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7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주 여러 유적에서도 철제 혹은 토제마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고대 제사에서는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눠 마시는 의식이 있었다. 7세기 후반 신라통일 초 문무왕과 백제 왕자 융이 취리산에 올라 백마를 잡아 피를 입에 묻히며 전쟁하지 않을 것을 금서철궤로 맹세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말을 죽여 묻는 대신 토제나 철제로 만들어 같이 매장하는 풍속으로 변했다. 이 같은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내려온다, 문수산성에서 함께 나온 도제마는 늦은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에필로그

김포 문수산성은 고구려 비사성(比史城)으로 안내판부터 정정해야 한다. 조선 숙종 대 축성 기록이 바꿔져야 한다. 1500년 역사를 200~300년으로 축소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중국 땅이 된 요령성의 비사성은 우리 국민들이 자주 갈 수 없지만 관광지이기도 한 김포 통진의 제2 비사성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고 이 성을 답사한다면 더 흥미로운 유적이 될 것이다.

비사성은 해항 유적으로 고구려 ‘혈구(穴口)’인 강화도 삼랑산성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사적이다. 고구려 초축 당시 장엄한 석축의 유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축조방식은 환도산성, 오녀산성, 태자성산 산성을 비롯해 남한지역의 여러 고구려 성지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축성 형태에 대한 고찰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출토된 와편에 대한 재조사 평가다. 이 성에서 출토된 적색와편은 고구려 유물로서 재해석돼야 한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또 하나의 고구려 유적을 찾은 벅찬 기쁨으로 답사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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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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