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치란 박사
인도 델리대학교 객원교수
국제불교연맹운영위원(인도)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태국본부 집행위원
조계종은 지금 제34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요동치고 있다. 한국불교의 현실과 조계종의 권력구조나 제도상으로 볼 때, 불가피한 현상이다. 누구를 어떤 방법으로 행정의 수장 자리에 앉히느냐를 놓고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만큼 승단이 권력 지향적 내지는 정치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승단이 본래의 정신에서 이탈되고 부정(不淨)과 이단(異端))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아래서 한국불교의 정상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필자의 소감이다. 주제 넘는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한국불교의 변화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승단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승단의 정화는 빅슈·빅슈니(비구·비구니) 승가의 회복이다. 물론 승단의 구성은 재가의 남녀신도가 포한된다. 그렇지만 승단이라고 하면 출가승이 주류이고 재가자는 종속으로서 승단을 존경하고 외호하는 역할이다. 대승불교운운하면서 재가자(보살)를 출가자와 동등시하는 것은 불교정신에 맞지 않다. 승단의 정화는 가장 먼저 율장을 따르는 것이다. 율장은 부처님이 승단을 위해서 정해 놓은 윤리도덕의 기본정신이며 승단규칙의 모법이다.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승단으로부터 적통을 계승한 법장부(法藏部, 담마굽타카 Dharmaguptaka)의 계율인 <사분율(四分律)>을 따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대만 베트남이 이 법장부의<사분율>에 따라서 수계를 행하는 전통이 확립됐다.

일본이나 몽골을 빼고는 동아시아 불교는 부처님의 승단으로부터 상좌부 계통인 화지부(化地部, 마히사사카 Mahīśāsaka)에서 분파한 법장부의 전통을 수용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기원후인 후한 시대에 들어왔지만, 빅슈(비구) 승단은 2세기가 지나서야 형성됐다. 이 때 법장부 소속 빅슈들이 수계의식을 집전했다. 이 전통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문제는 빅슈 승단의 실천이 중요하다. 빅슈·빅슈니가 되었으면 <사분율을>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빅슈다운 위의를 갖춰야 한다. 빅슈의 위의(威儀)는 3의1발(三衣一鉢)이다. 상, 하의와 가사 그리고 식기인 발우이다. 발우는 한국사회의 구조 때문에 탁발용은 소용없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승복과 가사는 원상대로 복원되어야한다.

문헌에 의하면 법장부 소속의 빅슈들은 붉은 색 가사를 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어떤 기록에서는 검정색 가사도 수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치의(緇衣: 색깔은 검정색도 붉은 색도 아닌 중간정도의 색)의 색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지부는 청색의 가사를 수했다고 하지만, 상좌부의 전통은 노란색이나 주황색 자주색 홍색이었다고 하는데, <송고승전>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의 빅슈들은 자주색이나 심홍색의 가사를 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사문제는 한국불교 현실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가 있으나, 상좌부의 분파인 법장부의 전통에 따르면 자주색이나 홍색 황색의 가사를 수하고 승복을 입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 장삼이나 두루마기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항상 가사를 걸치는 빅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 남방 상좌부 권인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비구들은 승복과 가사색깔이 거의 비슷하다. 티베트 불교도 상좌부의 분파인 근본설일체유부의 계율에 의해서 자주색 가사와 승복을 입고 있다. 중국 대만 베트남도 노란색으로 통일했다. 일본은 종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다른 나라 적통 비구(빅슈)들과 동질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승복과 가사색의 변화가 와야 한다.

둘째는 한국불교사관의 재인식이다. 지금 한국불교를 인식하는 관점이 동아시아불교라는 큰 틀에서, 대승교학 또는 선불교로 보고 있다. 중국(대만 베트남 포함) 한국 일본을 동아시아 불교로서 한 묶음으로 보는데, 이것은 가장 주된 것이 한문 경전어(經典語)의 공통성 때문일 것이다. 대승교학이나 선불교의 전통도 어느 정도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송 시대불교에 초점을 맞췄을 때 설득력이 있지만, 중국불교 통사에 입각하면 중국불교사는 요·금·원·청이라는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시대의 티베트불교의 밀교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고대불교는 중국이나 신라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중세이후에는 종파 불교화에 의한 동아시아의 전통불교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근세에는 그 이질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다.

한국불교는 대승교학과 선불교의 전통을 이으면서 밀교와 정토불교를 포용하고 있는 통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부처님의 적통인 상좌부의 빅슈 승단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중국 한국 일본을 동아시아 불교 권이라 하여 하나로 계속 묶어가도 되는 것인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미국의 일부 중국 일본 한국 불교전공학자들의 동아시아불교론 주창과 일부 한국내의 추종자들의 재고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한국불교는 통불교로서 종합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자면 발과 다리부분은 철저하게 부처님의 적통인 상좌부 즉 법장부의<사분율>계율정신에 의한 빅슈 승단과 근본불교와 부파불교를 따르고, 몸통과 가슴 부분은 대승교학과 밀교 정토불교로 구성됐으며, 머리 부분은 선불교로 장식되어 있다.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라고 하면서 한 묶음으로 이론화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국불교의 특성과 독창성을 확립해야할 시점이다.

셋째는 국제 불교교류의 변화이다. 지금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 마을로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 발생 이래, 모든 불교의 전통과 전승과 변형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불교의 원류는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율상으로는 부처님의 적통인 상좌부의 한 분파인 법장부에 두고 있으며, 교리 사상 철학은 소·대승교학에 바탕을 두고, 신앙은 정토와 밀교적 요소에 의존하고, 대표적인 상징은 화엄을 몸체로 한 선불교를 내세우고 있다. 참으로 이상적인 통불교형 종합불교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 불교처럼 이상적인 배합의 통불교는 없다. 한데 이런 이상적인 통불교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어느 한 부분만을 내 세우려 한다. 한국불교는 족신두(足身頭) 불교를 정립해야한다고 본다. 족(足)은 모든 동물이나 사람을 지탱해 주는 초석이다. 상좌부의 적통을 계승한 법장부의<사분율>을 빅슈·빅슈니 승단의 규율의 모체로 삼아서 승단도덕윤리의 기본정신으로 삼아야 한다. 신(身)은 몸통으로서 인체의 중요한 부분인데, 소·대승교학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정토와 밀교의 주력으로 가슴을 뜨겁게 달궈야 한다. 두(頭)는 그야말로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방향타가 되어야 하는데, 화엄을 몸체로 한 선불교를 수행해야 한다. 결국 족신(足身)과정을 철저하게 다지고 선수행을 거쳐서 선불교를 내세워야한다. 한국불교의 국제교류와 세계화의 답은 자명해 졌다.

국제불교 교류에서 한국불교를 대승불교니 선불교니 하면서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고 티베트불교를 막연하게 밀교라고 하는 생각이나 관점을 빨리 전환해야한다. 남방 상좌부나 티베트 불교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정토불교는 중국이나 대만이 차지하고 있고, 선불교와 정토의 혼합은 베트남 불교가 그리고 선불교(젠 Zen)는 일본 불교가, 중관유식을 배경으로 한 대승교학 불교와 보살불교로서의 밀교는 티베트 불교가 독점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어떤 불교를 내세우고 있는가. 한국불교는 앞의 모든 불교의 요소를 다 포용한 통불교형 종합불교이면서도 어느 한 부분도 똑떨어지게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음식 가지고, 감상주의적인 힐링가지고 세계불교계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는 발상이 가련해 보인다. 동아시아불교라는 미명아래 한중일 불교 교류에만 주력하고 전 세계불교와의 교류에는 배타성을 갖는 것 같다. 세계불교와의 폭 넓은 교류는 시대적 과제이며 같은 일불제자로서의 의무요 책임이다. 학술교류도 한문경전어에만 의존한 불교학 연구나 교류에서 빨리어 산스크리스트어 티베트어 경전어에 의한 영어가 보편적인 공용어로 정착이 되어야 세계의 학자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불교내적인 국제교류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때 타종교와의 교류도 효과적으로 가능해진다고 본다. 확실한 상품을 가지고 세계시장에 나서야 물건이 잘 팔리지 않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통불교형 종합불교로서의 위상을 찾는 일이 급하고, 비유하자면 족신두(足身頭)의 과정을 거친 선불교의 선양이 한국불교 세계화의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승복을 바꿔 입고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자나, 금고문을 열어놓고 돈을 빌려주는 자가 어떻게 빅슈·빅슈니의 행정수장이 될 수 있으며, 재가신자의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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