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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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순 시진핑 주석은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또한 중국·아랍 정상회의와 중국·걸프협력이사회(GCC) 회의가 개최됐다. 시 주석은 최소 17개국 정상과 회담하고 아랍권과의 관계를 다졌다. 사우디와 중국은 약 500억 달러(약 65조 3천억원) 규모의 투자협정을 체결했으며 특히 주목할 것은 중국 측이 사우디를 포함해 아랍권 산유국들에 원유거래의 위안화 결제 허용을 요구한 것이다. 사우디는 중국의 요청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정부는 사우디를 방문하는 시진핑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다. 지난 7월 바이든의 방문 때와는 확연하게 비교되는 수준이었다.

사우디는 1951년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친미 국가이다. 하지만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서는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 무기를 수입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미국이 국제원유시장의 안정을 위해 원유 증산을 요청한 데 대해 응하지 않고 있다. 이제 중국과도 밀착하며 원유거래의 위안화 결제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사우디의 이러한 모습은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리 바이든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를 2018년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왕따시키려 했던 데 대한 감정적인 대응만은 아니다. 빈 살만 왕세자는 4년 전에 새로운 유럽이 바로 중동이며 중동이 유럽의 지위를 대신할 것이라는 야심 찬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사우디가 5년 안에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세 나라도 강력한 경제력의 뒷받침으로 5년 안에 크게 바뀔 것이며 UAE, 오만,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이라크 등에도 기회가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사우디가 성공하면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되면 향후 30년 동안 글로벌 르네상스는 중동에서 일어날 것이며 이를 위한 사우디의 투쟁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을 분할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중동이 세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다.

물론 미국의 핵심 이익인 ‘페트로 달러(petrodollar)’ 협약이 쉽게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협약은 1974년 1차 석유 파동 때 사우디와 미국이 맺은 것으로서 미국이 사우디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원유거래의 결제는 오직 달러로만 한다는 약속이다. 그 덕분에 국제 결제 수단으로서 달러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 여전히 양국은 경제·안보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사우디는 라이벌인 이란과 대립 관계에 있는 등 약점이 많은 나라이다. 머지않아 사우디가 원유거래의 위안화 결제를 허용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우디의 최근 행보를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 일시적인 마찰이라고 과소평가하기도 어렵다. 사우디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과의 거래에서만 위안화 결제를 허용해도 이미 진행 중인 탈(脫)달러화(dedollarisation) 추세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러시아, 브라질, 인도, 중국 등 ‘브릭스(BRICS)’ 회원국들 사이 거래의 상당 부분이 자국 및 상대국 통화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2022년 3월부터 대러 제재에 참여하는 비우호국에 대해서는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하도록 강제했다. 만일 사우디가 달러 결제 의무화를 전면적으로 해제한다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미·중 간 패권 경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사우디의 선택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더욱이 사우디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뭉친 브릭스에 올해 7월 가입 신청을 했다. 그밖에 튀르키예, 아르헨티나 등도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매력평가지수에 따른 GDP 통계에 따르면 세계 경제 전체에서 서방 선진국 모임인 G7이 차지하는 비중이 1980년대에는 50%가 넘었으나 2010년대 중반에 30%대로, 2020년에 29.2%로 지속해서 떨어진 반면에 ‘브릭스’의 비중은 이미 2015년에 30.6%에서 2020년에 35%로 올라갔다. 적어도 경제 규모 측면에서는 서방이 압도적 우위를 누리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사우디와 중국의 밀착에 대해 시진핑이 대중동 외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에 더하여 이번 사우디-중국 정상교류의 중요한 시사점은 사우디가 러시아 및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 미국 등 서방의 중동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고 향후 아랍의 독자 세력화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사회 세력 판도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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