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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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이 12월 5일부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 가격 상한제를 시행했다. 일단 상한 가격을 배럴당 60달러로 책정하고 시장가격보다 5%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2개월마다 조정한다고 한다. 이번 조치는 가격 상한보다 높은 가격에 수출되는 러시아 원유에 대해서는 보험과 운송 서비스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시행된다. 다만 송유관으로 수송되는 원유는 대상에서 제외한다. 따라서 이번 조치에 직접 참여하는 나라들뿐만 아니라 해상으로 수입해야 하는 나라들도 결과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러시아산 원유 가격을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묶겠다는 것이다. 서방은 이번 조치를 통해 러시아의 원유 판매 수입을 제한해 전쟁자금 조달에 영향을 주고 동시에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을 통제해 고유가에도 대응한다는 계산이다. 서방의 이러한 반시장적인 가격 규제 조치는 러시아의 강한 반발은 물론 시장의 교란을 초래하고 거래 당사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규제를 벗어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방의 이번 조치에 대해 러시아는 현재 첫째 이번 규제에 직접 참여한 국가들에는 단 한 방울의 원유도 수출하지 않는다, 둘째 가격 상한이 포함된 계약 체결 자체를 금지한다, 셋째 우랄산 원유의 북해산 브렌트유에 대한 할인 폭 최대치를 설정하고 이를 초과하는 판매는 금지한다 등과 같은 대응책을 검토하고 있는데 첫 번째 방안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또한 러시아는 필요하면 서방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보험과 운송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소위 ‘그림자 선단’을 이용해 수출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번 가격 상한제 시행으로 어느 정도가 되었든 러시아산 원유의 공급 감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OPEC+는 수급 불안정을 고려해 추가 감산을 고려하지 않지만 증산 계획도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미국의 증산 요청에 대해 이런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모두 가격 상한제에 대해 회의적이다. 서방 전문가들도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경우 중장기적으로는 원유에 대한 수요가 감소해 유가가 떨어질 것으로 보면서도 단기적으로는 러시아 원유의 공급이 줄어들어 유가가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러시아가 서방의 조치에 굴복해 상한 가격 이하로 원유를 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바람은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 러시아는 조세수입에서 차지하는 원유 수출세의 비중이 상당한 것이 사실이나 양호한 재정수지와 상당한 경상수지 흑자를 고려할 때 앞서 살펴본 첫째 대응책으로 맞서며 관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유럽국가들이 유럽의 경제에 필수적인 러시아산 가스를 배척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대체재인 미국의 셰일가스를 러시아산보다 3~4배 비싼 가격을 주고 사야만 했고 러시아가 중국과 인도에 싼값에 판매한 것을 웃돈을 주고 수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연합이 러시아산 에너지원 수입을 제한하면 국민들은 큰 고통을 받고 에너지 기업들은 떼돈을 벌게 된다. 그래서 서유럽 정부들은 떼돈을 번 기업들로부터 ‘횡재세’를 거둬 국민들에게 에너지 보조금을 나눠주겠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이번 가격 상한제 시행도 결국 유럽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민들을 애꿎은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여러 차례 강력한 제재를 취했는데도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은 왜 자신은 물론 이번 전쟁과는 무관한 나라들마저 어렵게 하는 것일까? 존망의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를 지켜주기 위해 다 함께 피해를 무릅쓰자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러시아를 힘들게 하는 것이 목적인가? 서방에서 러시아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지난해 하반기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나토와 미국에 대해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해소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 아닌가? 서방이 진정으로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러시아와 협상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서방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방은 러시아와의 협상에 있어 우위에 서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우크라이나에 대해 나토의 지원이 없었다면 벌써 끝났을 전쟁을 계속하도록 독려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낼 정도의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희생은 계속될 것이다. 서방의 생각과 행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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