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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연(朴堧)은 이러한 아악(雅樂)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상소까지 올리게 된 것인데 평소 음악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세종은 박연이 상소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그에게 아악을 정리하고 개량하는 작업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박연은 중국 주나라의 음악제도(音樂制度)를 고증과 실험을 거쳐서 ‘주례(周禮)’에 밝혀진 내용에 추가적인 해석을 가해서 조선의 아악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 아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쇠로 만든 종인 편종(編鐘)과 돌로 만든 타악기인 편경(編磬)이 필요하였는데 소리가 아름답고 은은한 편종과 편경은 중국에서 들여온 악기로, 우리나라에는 그때까지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박연은 주종소(鑄鐘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종소리를 듣고 또 고치는 일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1429(세종 11)년 편종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편경은 무엇보다도 악기를 제조하는데 있어서 알맞은 돌을 찾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 돌을 찾기 위해 박연은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 관원(官員)들을 파견하여 돌을 수집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향악(鄕樂)과 아악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한 결과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악보(樂譜)에는 원구악(圓丘樂)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세종과 함께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의 향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것이 세조(世祖) 이후에 아악을 대신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말하여 궁중음악(宮中音樂)에서도 중국의 것을 원용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음악을 사용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음악적 공헌(音樂的貢獻)에 기여(寄與)한 박연은 축(丑)과 악현(樂懸)의 제도(制度)를 개정했으며 특히 악현의 제도를 원래대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박연은 노년(老年)에 이르러 영동으로 귀향하여 향악의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가 1458(세조 4)년 향년(享年) 81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박연은 생전에 피리 연주를 잘하였다고 하며 오늘날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동의 초강 서원(草江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고, 저서로는 ‘난계유고(蘭溪遺稿)’와 ‘가훈(家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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