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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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저항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홍타이지 자신이 조선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금적금왕(擒敵金王)이었다.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라는 생각에는 그를 따라 참전한 강홍립의 조언도 기여했을 것이다. 병자호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의 포위와 광교산의 일전, 강화도에서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홍타이지의 금적금왕계가 주효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전국적 규모의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킨 조선의 사대부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지만, 인조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외면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에 배치된 조선의 정예부개는 청군의 배후를 강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김자점은 양평에 주둔하면서 몇 차례 인조의 구원요청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을 지원하지 않았다. 인조와 서인의 조정은 국내에서조차 외면의 대상이었다.

홍타이지의 친정은 조선왕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일개 장수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 덜 수치스러울 것이다. 삼전도에게 항복의식을 거행할 때 홍타이지는 최대한 인조의 체면을 세워줬다. 그는 인조를 죽이지도, 폐위하지도 않았다. 왕위를 유지한 인조는 지독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인질로 잡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노릴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인륜까지 저버렸다. 소현세자의 가족은 비참하게 피살됐다. 홍타이지는 그것까지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병자년 겨울, 조선의 수도 한양을 눈앞에 둔 파주에 도착한 그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된다. 한양의 진산인 도봉산에서 북악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그의 눈에는 부친 누르하치가 누운 모습으로 보였다. 놀란 그가 마음속으로 묻는다. “아버지! 왜 거기 계십니까?” 진격을 멈춘 그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월롱산성으로 올라갔다. 영면한 부친을 닮은 산자락은 부친이 추앙했던 문수보살의 자태로 보이기도 했다. 한양의 진산에 누운 부친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그는 월롱산성에 대를 쌓고 제사를 올리며 부친에게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야할지 물었다. 한나절이면 도착할 한양성에는 3일의 여유가 주어졌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미 강화도로 피했고, 머뭇거리던 인조는 이 3일 동안에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숨었다. 골든타임이라고 할 이 3일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에 대한 조선의 기록은 빈약하다. 그것도 대부분은 치졸한 변명뿐이다. 청사고를 뒤적이며 당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느라고 10년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누르하치이기도 했고, 때로는 홍타이지이기도 했다. 임진, 정유, 정묘, 병자년에 잇달아 발생한 외침은 결코 조선반도에서 벌어진 국지전이 아니었다.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동아시아는 물론 이미 시작된 서세동점의 과정을 섭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이 거대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억울하게 죽은 중국의 원숭환이 돼 통곡하기도 했고, 변화의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킨 히데요시가 돼 마음껏 꿈을 펼치기도 했다. 이여송의 고뇌와 범문정의 결단이 깊이 다가왔다가, 이순신과 이덕형에 이르러 두터운 벽에 박힌 것처럼 답답했다. 심양으로 잡혀가던 김상헌이 다시 봐야 할 삼각산이 왜 홍타이지에게는 문수보살로 재현한 누르하치로 보였을까? 임진전쟁 전후 100년의 동아시아는 인류사에 보기 드분 격동의 시대였다. 상식과 경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때, 종전 동아시아의 주류였던 명과 조선의 연계체계가 무너지고, 변경에 불과했던 일본과 만주가 변화를 주도했다. 갈피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눈을 떠보면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나는 더 깊은 근원을 찾기 위해 이제 스페인의 1492년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보아야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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