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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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미국, 유럽연합 등 서방은 수많은 경제제재를 발동했다. 서방은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주고, 그 결과 러시아 국민들이 불만을 품게 되고 이어 푸틴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정도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길 기대했으나 러시아의 국내상황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서방은 또한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으나 현재까지 서방의 예상과는 달리 비서방권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9월 하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남부 점령지를 병합하자 유엔은 10월 중순 긴급특별총회를 개최해 러시아의 조치를 규탄하는 결의를 압도적 다수로 채택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의 외교적 참패 이야기가 나오는데 러시아로서는 그러한 결의가 채택되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고 유엔총회 결의는 회원국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만큼 러시아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현재까지 대러 제재를 발동하거나 그러한 제재에 동참해 러시아가 ‘비 우호국’으로 선언한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유럽연합 27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48개국이다. 이는 유엔 회원국 193개국의 4분의 1 수준이며, 면적과 인구로 보면 그 비중은 훨씬 더 낮아진다. 그간 유엔에서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가 수차례 있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및 중남미 국가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대해 어떤 제재도 취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서방권의 절대적 우위는 옛말이고 비서방권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1999년 G20이 발족한 것은 G7만으로는 국제사회의 문제를 다루기가 역부족인 현실의 결과이다. 2022년 G20 주최국인 인도네시아는 이번 11월 정상회의에 서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도 초청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공동 대응하는 비서방권 강대국들이 모인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및 남아공)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서방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도와 중국은 서방이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의 수입을 대폭 늘림으로써 러시아에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더욱이 브릭스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세를 불려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아르헨티나와 이란이 가입을 추진하고 있고,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이집트, 태국 등도 가입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서방권의 일방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라들이 브릭스에 합류하고 있는 추세이다.

중동 지역도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우선 대표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미국의 원유가 안정을 위한 증산 요구에 대해 오히려 감산 조치로 대응했고,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도 러시아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제재는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대공 무기 시스템 지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유럽 내에서도 헝가리, 세르비아 등은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 정책에 저항하고 있으며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서방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현재 유럽 각국에서는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의 수입을 차단한 결과 발생한 에너지 가격 폭등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러 정책을 재고하라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유럽국가들과 미국 사이에 균열이 일어날지는 이번 겨울이 고비로 보인다.

러시아가 극동지역 개발을 위한 투자 유치를 위해 매년 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하는 동방경제포럼이 올해도 열렸는데, 60여개국에서 정부 인사와 기업인 등 7천여명이 참석해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협력하고자 하는 나라와 기업이 여전히 많이 있음이 확인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대통령이 참석한 적도 있고 올해도 러시아와 이미 비즈니스를 하고 있거나 러시아에 관심 있는 기업인들 상당수가 참석했으나 정부에서는 현지 공관에서 참가했을 뿐이며 국내 언론은 대부분 이번 포럼에 대해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국내 매체들은 이번 전쟁의 배경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판단해 일방적으로 러시아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국제 언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영미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에 춤을 추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들의 전쟁이지 결코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언론에서 흔히 ‘국제사회의 여론’ ‘국제사회의 규탄’ 등과 같은 표현을 쓰는데 대부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의 의견일 뿐이며 전 세계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국익을 지키고 증진하려면 중심을 잡고 국제사회의 흐름과 분위기를 정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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