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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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면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하나는 중전 소헌왕후였고 둘째 딸 정의공주다. 저명한 한글학자 전 고려대 정광교수도 이 점은 인정하고 있다. 궁궐안의 여인들이 한글의 일부를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2년 전 청주 초정약수를 다녀왔다. 실록을 보면 두 번이나 다녀 왔는데 초정에서 묵은 날은 모두 121일이나 됐다. 그런데 초정 행차에는 소헌왕후를 대동했다. 총명한 정의공주를 데리고 갔다는 기록은 없다. 정의공주는 이미 출가한 몸이었으므로 동행이 어려웠을 게다.

소헌왕후는 8명의 아들과 2명의 공주 등 10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첫째는 조서한 문종이고 둘째가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정의공주는 수양대군의 누나로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

소헌왕후는 세종에게 있어 항상 애틋한 상대였다. 왕후는 두 살 연상으로 세자시절부터 누나처럼 의지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소헌왕후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사건이 벌어진다. 친정아버지 심온이 억울하게 역모에 관련돼 죽었으며 친정어머니도 관비가 돼 천한 신분으로 전락한다.

이는 태종이 세종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간여할 때였다. 심온을 음해한 세력들이 소헌왕후의 폐출을 강력 주장했다. 세종은 이 일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은 장인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왕후에 대한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았다. 태종이 승하하자 즉시 장인을 신원하고 관비로 고생하던 장모를 복권시켰다.

훈민정음 반포는 세종 28(1446) 음력 910(양력 109) 이뤄졌다. 그런데 이해 이질로 고생하던 소헌왕후는 향년 52세 나이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세종은 개성 불일사(지금은 폐사)에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장생을 기원했다.

그 이듬해 세종 291447AD에는 한글창제 이후 첫 사업으로 아들 수양대군에게 명해 석보상절을 짓는다. 자신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월인석보를 완성하는 것이다.

10년 전 정통121447AD에 만들어 졌다는 옥책(玉冊)이 발견 됐으며 언론에 공표됐다.

필자도 직접 친견한 유물이었다. 그동안 일부 학자들 사이에 진위논쟁이 제기돼 유물이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 옥책은 불교 입장에서 보면 공양경(供養經)이다. 왕실에서 소헌왕후의 극락장생을 기원하기 위해 360여개의 옥책에다 월인석보 8권을 각자해 공양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불경 안의 사연은 모두 소헌왕후와 같은 삶을 산 무량수경의 위제희(韋提希), 원앙부인 극락 왕생연기에 대한 얘기다.

한글날을 맞아 필자는 다시 이 옥제경을 친견했다. 옛날 전통 옥각법(玉刻法)에 따라 정연하게 각자한 글씨들은 고대 사경체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월인석보 구권을 보고 각자한 것으로 해석 된다.

세종은 아내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 아들 세조의 효성(孝誠)에서 탄생한 이 공양경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한국의 정신문화유산이다. 그것도 세종, 세조 부자가 한글 창제 이후 첫 사업으로 국역해 귀중한 옥에 각자해 수천년 변하지 않을 징표를 남긴 것이다.

한글날을 맞아 이 옥제 공양경을 생각하면 감동이 열배 더해진다. 이 시대 무너진 인륜의 중요성에 대해 고언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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