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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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중순 미국에서 인플레감축법이 발효됨으로써 앞으로 수입 전기차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그 충격이 상당하다. 민주당이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해 의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고 곧바로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이 이루어진 탓인지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연합과 일본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해 대응하지 못했는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가 대표단을 보내 미 측과 협의를 시작했다고 하나 미국의 국내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우리 측 요구가 가까운 장래에 수용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 마디로 버스 떠난 후 손 흔들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미국 인플레감축법과 관련한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면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우선 미국의 행보에 대해 허탈해하거나 실망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 강화 차원에서 이런저런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인도 태평양 경제협력(IPEF) 참여, 쿼드(QUAD)에의 부분적 참여 검토, 반도체 동맹이라는 소위 칩4(chip 4) 참여 등이 예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에 적극 보조를 맞추고 지난 5월에는 윤 대통령이 나토정상회의에 참석해 명백히 반러시아 대열에 줄을 섰다. 이처럼 현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머뭇거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호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허탈해하는 것이다. 또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방한 때 첫 일정으로 삼성전자 공장을 찾아가는 ‘쇼 아닌 쇼’를 하면서 삼성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쓸어갔는데 이번 전기차 보조금 조치에서 한국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고 서운해 한다. 현 정부에 들어와 갑자기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미국이 한국을 띄워준다고 해서 우쭐한 기분에 또는 미국의 요청을 모두 수용하지 않으면 북한 핵에 대한 확장 억지가 약화되지는 않을까 우려해 무작정 따라나서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제사회에서 어떤 나라도 남을 위해 자기 이익을 희생하려 하지 않으며 알아서 남의 이익을 챙겨주지도 않는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고 역사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아직도 조선 시대를 지배했던 성리학적 가치인 ‘의리’의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이번 행보는 예상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미국이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 ‘동맹국의 등에 칼을 꽂았다’라는 식의 표현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미국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는 좌파의 시각이나 미국은 그럴 나라가 아니고 한국에 대해 항상 ‘자애로운 형님’ 같은 나라라는 일부 우파의 인식 모두 타당하지 않다. 국익에 관한 한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 그동안 미국이 관대한 나라로 보인 것은 원래 미국의 속성이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누리는 동안 갖고 있었던 자신감과 여유의 결과이다. 1990년대에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미국 사람은 미국분도 아니고 미국놈도 아니며 미국인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의 대세가 이미 오래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자유무역협정의 확산도 WTO라는 보편적인 자유무역체제에 어긋나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수세에 몰리자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보호무역주의 조치를 남발했다. 한동안 미국이 자유무역의 챔피언으로서 전 세계를 상대로 통상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기울인 적도 있으나 이제는 자유무역체제를 흔드는 조치를 서슴지 않고 있다. 현재 바이든 대통령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외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기술 패권을 유지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밖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들도 미국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움직임의 밑바탕에 11월 중간선거에 목을 매는 바이든 대통령의 절박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냉전이 끝나고 한동안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자 기세등등한 신자유주의가 ‘세계화’ 바람을 몰고 왔으나 이제는 역풍이 불고 있다. 사실 한국은 그간 ‘세계화’의 물결에 편승해 덕을 본 나라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빚어진 서방과 러시아 사이 경제전쟁까지 겹쳐 이제 좋은 시절은 끝나가고 있다. 앞으로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 보호무역주의 파고를 어떻게 넘을 것인지 고민할 때이다. 그리고 국가 간 관계에 대한 이해와 국제정치관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대비도 하고 대응도 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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