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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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하순 국내 언론은 한국수력원자력이 총 300억 달러(40조원) 규모의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프로젝트 중 약 3조원에 이르는 터빈 건물 시공과 기자재 공급권을 따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009UAE 바라카 원전 4기 수주 이후 10여년 만에 한국이 외국의 원전 사업에 참여한 것이니 매우 반가운 소식이긴 하나 ‘K-원전이 스핑크스 뚫었다?’ ‘이집트서 3조 잭팟 터졌다등 기사 제목은 선정적이다. 그리고 일부 매체 특히 방송은 한국 기업이 이집트에 원전을 수출하는 것처럼 보도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한수원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수원은 25일 카이로에서 러시아 로스아톰(Росатом)의 원전건설 담당 자회사 로스아톰스트로이엑스포르트(Росатомстройэкспорт)와 엘다바 원전의 원자로 건물을 제외한 부속 건물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2017년 이집트 원자력청이 러시아 로스아톰에 엘다바 원전 건설사업을 발주했고 이번에 한수원은 주계약자인 러시아 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원전의 핵심 설비인 원자로와 증기발생기를 공급하는 경우에만 원전 수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 매체들은 러시아 회사가 한국 측에 3조원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일감을 준 것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집트 엘다바 원전 사업의 주계약자인 러시아 로스아톰이 한수원과 계약을 체결한 것은 과연 당연한 것일까? 올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한국은 서방의 대러 적대정책에 보조를 맞춰 유엔에서의 대러 규탄 결의에 찬성하고 러시아 금융기관과의 거래 중지, 전략물자 수출 금지 등 각종 제재를 취했고,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분위기이고,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친우크라이나적 태도를 보였으며 지난 5월에는 나토정상회의에 참석해 반러시아 대열에 동참했다. 서방 무기가 우크라이나로 전달되는 통로인 폴란드에 대규모로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러시아는 한국이 간접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당연히 러시아가 지정한 비우호국 명단에 올라있다. 한국의 이러한 대러 자세를 고려할 때 러시아의 국영기업이 한수원에 하청을 준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일부에서는 UAE 원전 건설 사업 당시 사막의 먼지를 막기 위해 대형 텐트까지 쳐놓고 공사했던 한국 특유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 기업이 하도급 후보 자격이 있다는 말은 되나 러시아 회사의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 쪽에서는 러시아가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데 이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사실 로스아톰은 미국의 제재 대상에 들어있지 않으며 에너지 분야의 대금 거래도 국제 금융 결제망 배제 대상에서 빠져 있다. 로스아톰은 현재 11개 국가에서 총 35개 원자로를 가동하거나 건설하고 있는데 서방이 제재하는 경우 단순히 로스아톰의 재정적 손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들의 전력 공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정치적 불안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11개국에는 유럽연합 국가들도 포함돼 있다. 이번 이집트 엘다바 원전에 들어가는 터빈은 미국이 공급하기로 돼 있다.

따라서 로스아톰의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라고 본다. 한수원의 이번 하청 수주를 보면서 러시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길게 보고 한국과 협력의 끈을 유지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러시아는 한국과의 비자면제협정을 유지하고 있고 비우호국에 대해 주요 원자재 수출을 제한하면서 일부 품목의 경우 한국은 예외로 하고 있다. 이른바 가치 외교운운하며 우크라이나 사태로 빚어진 반러시아적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러시아와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박진 외교장관은 4강 가운데 유일하게 러시아 외교장관은 아직 만나지 않았으며, 매년 9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고 푸틴 대통령이 참석하는 동방경제포럼에 과거 박근혜 및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바 있으나 이번에는 누가 참석하는지 아직 알려진 것도 없다. 경제통상 분야에서 정부 간 협의 채널이 유지되고 있는지도 의구심이 든다. 외교부는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며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보고했는데 어떻게 보면 양립할 수 없는 목표이며 그러려면 정교한 외교가 요구된다. 한국 정부는 그처럼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 놓고는 러시아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어 보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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