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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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은 국치일이다. 100여년 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참으로 부끄러운 날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이날의 분위기는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한일합방조약’에 대해 원천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사악함, 그리고 조선의 무능한 임금과 사리사욕만 챙긴 매국노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고 왜 우리는 나라를 뺏기는 수준의 나라였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본에 당했다고 해서 일본만 경계하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며 판단의 오류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당시 조선은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나라에 먹힐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 ‘착한 외세’이었을까?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형식적 종주권을 넘어 실질적 지배를 하고자 했으나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1904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보듯이 미국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역사 지식이 천박한 정치인이 대선 후보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당시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막 진입한 나라로서 일본의 조선 지배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넘보지 말기를 기대한 것이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관련해 우리가 굳이 ‘원망’을 한다면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다. 당시 영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러시아 견제로서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와 충돌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은 그러한 국제정치 구도를 이용해 대한제국을 병탄했다.

그러면 당시 조선이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조선은 봉건체제가 누적된 모순 때문에 무너지는 가운데 지배층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리사욕에 빠져 자기들끼리 싸우는 나라였다. 이러니 부국강병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은 전혀 다른가?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을 원망하고 일본의 악랄함을 들춰내는 일에는 열심이나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분위기는 미흡하다. 한일합방 이전에도 조선은 그에 못지않은 치욕을 겪은 바 있다.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없다 보니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영의정 류성룡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자고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반성문을 내놓기도 했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조선 임금이 한강 삼전도 나루터에서 만주족 임금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과거를 기억하기만 할 뿐 그에 대해 처절한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신상태가 200년 이상 계속돼 종국에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왜 우리 민족은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지 못했을까?

또 하나 큰 문제는 우리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면서 일본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재무장 및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요란하나 중국의 군사 대국화와 팽창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말조심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바람은 동남쪽에서만 불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한국전 때 겪지 않았던가? 1950년 10월 남북통일의 결정적 기회가 왔으나 누구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는가? 그런데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방문 때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이고 한국은 그 주변 ‘작은 나라’라고 부르며 심지어 중국의 팽창주의를 상징하는 ‘중국몽’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국가 지도자의 언행이었다. 그런 대통령이다 보니 주중 대사는 시진핑에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표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적었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인용한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이 해방됐으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해 나라가 분단됐는데 만일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쳤더라도 분단이 됐을까? 국민의 삶과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는 말치레만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 헐뜯고 공격하며 당파적 이익만 추구하면서도 국민의 혈세를 꼬박꼬박 받아 챙기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100여년 전 조선 시대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다. 우리의 미래는 광복절을 기리는 것보다는 국치일이 올 때마다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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