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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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제사회에서 30~50클럽 국가들(1인당 소득 3만불 이상, 인구 5천만명 이상) 가운데 그 나라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것 같다. 특히 주한 중국대사를 대하는 한국 언론의 태도를 보면 그러하다. 외교의 세계에서 대사들은 조용히 주재국 정부를 접촉, 자국의 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거나 요청을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송에 출연하고 그것도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행동이다. 그런데 왜 한국 매체들은 중국대사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 입장을 우리 국민들에게 마음껏 떠벌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인가? 우리 매체들의 중심을 잃은 행태를 싱하이밍 현 중국대사의 부임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지난주 종편 방송인 채널A가 프라임 타임 뉴스 프로그램에서 싱하이밍 대사와의 인터뷰를 방영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신문이 아니라 방송이 외국 대사와의 인터뷰를 내보내는 일은 매우 드물다. 중국대사 인터뷰 방송의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으나 8.24 한중 수교 30주년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경우 대사는 양국 관계의 현황을 간략히 소개하고 양국 관계의 발전을 희망하는 덕담 수준의 발언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앵커의 질문을 보니 이 매체가 한국 매체가 아니라 중국 매체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대사가 양국 관계에 대해 마구 떠들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줬다. 질문을 구체적으로 보면, 1) 윤석열 정부가 전임 문재인 정부에 비해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슈는 반도체 공급 협의망 칩4입니다. 중국은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보시나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칩4 협의체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 3) 지난주 한중 외교장관 회담 이후에 사드와 관련해 국내에서 좀 논란이 됐습니다. 중국이 기존 거론됐던 3불 외에 1한, 기존 배치한 사드까지 제한하는 ‘1한’을 꺼내 들었는데요. 갑자기 꺼내 들었다, 이런 느낌도 있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4) 윤석열 정부는 이번 달 안에 성주의 사드 기지를 정상화하겠다고 하는데요. 그 경우 중국으로서도 추가 대응을 할 수도 있을까요? 5) 얼마 전 대만을 방문했던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한국에 왔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만나지 않고 전화통화만 했습니다. 대통령이 통화만 한 것은 적절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등이다. 과연 대한민국의 매체가 중국대사에 대해 던질 질문들인가? 중국 매체가 중국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왜 한국 매체가 공공재인 전파를 통해 중국 정부의 입장을 한국인들에게 홍보하는가? 그 매체는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중국을 편들고 싶어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2021년 3월과 11월 YTN, 그리고 올해 6월 TV조선이 싱하이밍 대사를 스튜디오에 출연시켰다. 앵커들은 그가 한국어를 구사해 통역 없이 소통되므로 이것저것 다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이슈에 대해 정통한 국제정치 학자에게 하듯 질문을 던졌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미·중 갈등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미국대사도 인터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지난 대선 유세 기간에 윤석열 후보가 사드 문제와 관련해 발언했을 때 중앙일보가 싱하이밍 대사의 반박문을 실어줬다. 그가 윤 후보의 발언을 반박하는 글을 주한 중국 대사관의 SNS 계정에 올렸다 해도 부적절한데 주요 국내 일간지가 그의 반박문을 게재하다니 제정신인가? 그 신문은 중국대사가 게재 요청을 했더라도 거절했어야 마땅하다. 대사가 주재국의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외교관의 본분에 어긋나며 외교 관계에 관한 국제협약에도 위배된다.

싱하이밍 대사는 2020년 1월 부임하자마자 한국 기자들을 불러모아 중국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외교 관례상 외교사절은 주재국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나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돼 있다. 주재국 외교부에 신임장 사본을 제출했다면 정식 제정까지는 주재국 정부가 허용하는 활동만 가능하다. 그런데 싱하이밍 대사는 이러한 국제관례를 무시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에서 어느 매체도 그가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정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 언론이 떠받들어 주니 그 후 그의 행동은 오만방자한 수준까지 치달았다. 한국 언론의 이런 행태는 중국 정부가 한국을 만만하고 쉬운 상대로 보게끔 하는데 일조하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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