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관객 목표 영화 ‘한산’
‘학익진’으로 일본 수군 대파
조선군 편에서 싸운 ‘항왜(降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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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천지일보 2022.08.09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영화 ‘명량’의 뒤를 이어 누적 관객수 1000만 돌파를 목표로 하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 4주차에 접어든 현재 700만 관객 돌파를 향한 여정에 들어갔다. 영화 ‘한산’은 명량해전 5년 전 진군 중인 왜군을 상대로 조선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전략과 패기로 뭉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한산해전(한산도 대첩)을 그렸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및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진주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익히 듣고 배워 알고 있는 명량해전과 한산해전을 스크린에 담은 김한민 감독은 “조선이 끝날 것 같았던 시기에 이순신이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가장 혁신적인 무기 거북선도 등장하고 세계적으로 완벽한 진법을 구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지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위안, 용기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더불어 소위 말하는 ‘국뽕영화’에 대해서는 “국방부에서 ‘명량’ 시사회를 했을 당시 장병들이 영화를 보고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며 “영화 ‘한산’이 장병들 가슴 속에 무한한 자긍심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국뽕’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국뽕 너머의 국뽕’이다. 진정성, 자긍심, 위로, 위안, 용기, 연대감이 영화로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 ‘한산’은 어쩌면 ‘국뽕영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뽕 너머의 국뽕’이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자긍심과 위로를 전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1000만 관객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 영화 ‘한산’을 통해 본 역사 속 한산도 대첩과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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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천지일보 2022.08.21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먼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과 이순신이 이끄는 3대 대첩은 다르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 대첩으로 해상에서의 전쟁이 하나, 육지에서의 전투가 두 번이다. 반면 이순신 장군이 이끈 3대 대첩(해전)은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그중 이번에 개봉한 영화 ‘한산’의 모티브가 된 한산도 대첩이 그 첫 번째로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장악한 뒤 순식간에 한양까지 진격했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마저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간 상태에서 일어난 해전이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옥포, 당포, 당황포, 율포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는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은 육지와 달이 바다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과 함선을 모아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에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가 싸움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 일본 수군을 이곳으로 유인 ‘학익진’ 진법을 펼쳐 대승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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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천지일보 2022.08.21

바다 위의 성, 학익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된 군함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배의 아랫부분이 평평해 빠르고 거친 물살을 잘 견디며, 판옥을 올려 많은 병사들이 한꺼번에 화포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해 돌격선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옥선 위에 거북등 모양의 덮개를 한 배로 임진왜란 당시 3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일본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였다. 이순신은 5~6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의 날개 모양으로 진을 펼친 뒤 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된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같다고 해 ‘학익진’으로 불리는 이 진법은 본래 지상에서 적을 포위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이를 바다에서 응용한 것은 획기적인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한산’에서는 원균의 “바다 위의 성”이라는 대사로도 기억에 남는 진법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47척의 배가 침몰하고 12척의 배를 빼앗겼으며, 약 6500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전투를 이끈 와키자카는 부상을 입어 200여명의 패잔병과 함께 도망쳤다. 이때 조선 수군의 전사자는 3명, 부상자는 10여명이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왜(降倭)’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항왜로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아 휘하 3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1592년 조선에 상륙했던 김충선(사야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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