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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지난 18일 오후 일본 도쿄 소재 외무성 이쿠라 공관에서 만나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제공: 뉴시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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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박진 장관이 한국 외교부 장관으로서는 2017년 12월 이후 4년 7개월 만에 일본을 방문했다. 강제징용 배상, 위안부 합의, 군사정보보호협정,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 등이 의제로 논의됐다고 한다.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양국이 그간 소원해진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모든 이슈가 과거사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고 국내적으로 징용 피해자들이 배상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부가 주관하는 민관협의체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어 문제 해결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특히 한국 사회에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 또는 사죄를 주장하는 기류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간 일본 정부는 고위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 여러 차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1995년 8월 담화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諸國)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했다. 1998년 10월 오부치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 후 발표한 공동선언에서 “금세기의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고 했다. 이에 앞서 1993년 8월에는 고노 관방장관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강제성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가끔 일본 고위 인사들로부터 이러한 발언을 흔드는 언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이러한 입장은 일본 역대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계승돼 왔다. 하지만 한국인 다수는 이런 사죄 및 사실인정 발언들에 대해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어 양국 간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이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사과에 진정성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어떠한 말을 해야 우리는 진정성을 인정할 것인가? 진정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일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국내 형사사건에서도 법원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게’ 사과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16세기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는데 조선 조정은 일본으로부터 사죄를 받아내었던가? 역사는 일본의 국교 재개 요구에 조선이 포로 송환 정도를 조건으로 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민족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리가 일본을 무찔러 해방됐다면 일본에 대해 우리의 직성이 풀리는 사과 또는 사죄를 강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직성이 풀릴 정도로 일본으로부터 사과 또는 사죄를 받아내려면 국력 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압도하거나 일본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인다.

과거 제국주의 시기에 유럽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 대륙 곳곳을 침략해 식민지배를 했는데 그들의 말처럼 오로지 ‘백인의 사명’을 수행했을 뿐인가? 그 나라들이 과연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와 국민에게 어떤 식으로 사죄했던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을 우리나라에서는 ‘신사의 나라’로 이해하고 있고 역시 대표적 식민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우리나라 사람들 머릿속에 ‘문화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말이 되는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피식민 국가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우리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일본이 나름대로 사죄를 했는데도 한풀이식으로 끝없이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현재 소위 ‘글로벌 중추 국가’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는 ‘토착 왜구’ 운운하며 국내정치적 목적을 갖고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윤석열 정부가 양국 관계를 개선 또는 회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얼마 있으면 8.15 광복절이 돌아온다. 이제는 일본 측의 사과 또는 사죄 발언에 집착하지 말자. 이미 일본 정부는 ‘사과’ 또는 ‘사죄’를 했다. 금전적 배상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 일본의 식민지배를 잊지 않되 일본에 대해서만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지 말고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었는지 곱씹어 보며 일본보다 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매진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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