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부터 20년여간 족벌정치
정부 요직에 전부 친인척 세워
외채 의존한 투자·부패 의혹도
감세 정책 실패에 경제난 심화
코로나로 핵심 관광산업 무너져
시민, 민생고에 정권 퇴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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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현지시간) 스리랑카 콜롬보의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관저에 시위대가 모여 있다. 스리랑카는 경제난에 분노한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를 점령한 가운데 야당 지도자들이 사임 의사를 밝힌 대통령의 후임을 정하지 못해 이틀째 정치적 공백에 빠져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안채린 기자] 극심한 경제난으로 결국 국가 부도를 맞은 스리랑카 국민들의 분노는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대통령에 총리까지 사임하게 만든 반정부 시위. 스리랑카 국민들은 왜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물고 나섰을까. 독립 이후 스리랑카가 최악의 경제난을 맞이한 배경으로 20년간 스리랑카를 지배한 라자팍사 가문의 부패와 실정, 부주의가 꼽힌다. 국가 경제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라자팍사 가문의 부패상을 5가지로 정리했다

1. 라자팍사 가문의 족벌 권력 체제

AFP 통신에 따르면 수천명의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까지 점령하자 긴급하게 사임 메시지를 낸 고타바야 라자팍사(73) 대통령은 군대 도움으로 긴급 대피해 13일 오전 군용기를 타고 몰디브로 향했다.

고타바야 대통령의 라자팍사 가문은 지난 2005년부터 20년 가까이 스리랑카 정계를 장악했다. 집권의 시초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고타바야의 형 마힌다 라자팍사(77)는 24살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2001년까지 여러 장관을 지냈다. 이후 2004년 총리를 맡았으며 2005년 대선에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2015년까지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통치로 스리랑카를 이끌었다. 당시 국방부 차관에는 고타바야가 자리했다. 

마힌다는 고타바야 외에도 라자팍사 가문 인물들에게 스리랑카 행정부 등 내각 주요 요직을 맡겼다. 마힌다의 대통령 재임 당시 그의 또 다른 동생 바실(70)은 경제부장관을 맡았으며, 장남인 차말(80)은 국회의장을 지냈다. 

마힌다는 헌법을 개정해 3연임 제한을 없애고 2015년 대선에 다시 나섰지만 족벌정치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낙선했다. 

그러던 2019년 부활절 일요일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전국에서 269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면서 라자팍사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됐다. 

재집권에 성공한 고타바야는 형 마힌다와 같이 또다시 주요 요직에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앉혔다. 마힌다는 총리직을, 마힌다의 장남 나말(36)은 청년·체육부 장관을 맡았으며 이 밖의 사촌·친척들 역시 요직에 자리했다. 

2. 인권탄압·국고횡령 등 계속된 부패 논란

오랜 집권과 동시에 라자팍사 가문을 향한 논란과 부패 혐의도 끊이지 않았다. 마힌다의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9년, 국방장관이던 고타바야는 타밀 분리주의 반군을 제압해 30년 가까이 이어졌던 내전을 종식하면서 스리랑카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주류 민족인 불교계 싱할라족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타밀족의 저항을 무차별 유혈 진압하는 등 민간인 4만여명을 학살하면서 인권탄압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유엔은 타밀군과 스리랑카 정부군 모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중국 차관으로 70억 달러를 들여오면서 중국의 국영기업, 고위 공무원들과 결탁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고타바야도 지난 2006년 우크라이나 전투기 구입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 조사를 받았다. 

마힌다가 3선에 실패하면서 바실도 국고 수백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2019년 고타바야가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모든 소송은 취하됐다. 지난해엔 국제적인 탐사 보도였던 판도라페이퍼스를 통해 라자팍사 가문의 딸이 수백만 달러를 숨겨둔 해외 계좌가 드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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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현지시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스리랑카 경찰이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관저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출입국관리소 관계자는 라자팍사 대통령이 부인, 경호원과 함께 몰디브 수도 말레로 향하는 스리랑카 공군기에 탑승해 출국했다고 밝혔다. (출처: 뉴시스)

3. ‘일대일로’ 실패… 과도한 중국외채 의지

마힌다는 내전 종료를 계기로 2010년 재선에 성공한 뒤 항만시설과 공항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집중 투자에 나섰다. 이와 함께 소비자 지출도 늘면서 2012년 스리랑카의 경제성장률은 9.2%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같은해 당시 중국의 차관을 받아 라자팍사 가문의 기반인 함반토타에 건설한 신항구의 사업 부진으로 정부는 큰 빚을 졌고, 결국 2017년 항만 운영권을 99년간 중국에 넘겨줘야 했다. 

2013년 개항한 마탈라 라자팍사 국제공항은 이용하는 항공사 수가 적어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텅 빈 공항’에 꼽히기도 했다. 

특히 2012년 말 중국이 적극 추진했던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인 ‘일대일로(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에 참여하면서 스리랑카는 대규모 빚더미에 앉게 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돈을 빌려 공항·항구·철도 등 각종 인프라 건설을 통한 경제 발전을 꾀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부채만 늘어 사실상 중국의 경제식민지가 됐다는 분석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510억 달러 규모의 국가 부채 중 중국 부채 비중이 10%라고 밝혔지만, 외신들은 그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인도 ANI통신은 스리랑카가 중국에 진 빚이 약 80억 달러인 총 국가 부채의 17%로 추산했다. 최근 미국의소리(VOA)는 스리랑카의 국가 부채 중 22%(110억 달러)가 중국에서 빌린 돈이라고 분석했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스리랑카가 일대일로 때문에 ‘빚의 덫(debt trap)’에 빠졌다”고 꼬집었다. 

4. 세금·재정 정책 실패도 악재로

스리랑카의 경제 위기를 부추긴 데에는 잘못된 재정 정책도 있었다. 먼저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라자팍사 친인척들이 정부 각료를 차지한 데다가, 막대한 외채가 있음에도 경제를 일으키겠다며 세금을 큰 폭으로 인하했다. 이에 따라 고타바야는 대통령이 된 2019년 말 부가가치세율을 15%에서 8%로 낮추는 등 급격한 감세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과도한 자국 화폐 발행으로 경제 위기를 더욱 부추겼다. 

지난해 4월에는 유기농 육성과 외환보유액 부족 등을 이유로 화학비료 수입을 금지하면서 주 수출품인 곡물 생산량이 43%가량 감소했다. 이에 따라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정부는 지난해 가을 화학비료 수입 금지 정책을 철회했다.

5. 도래한 팬데믹·전쟁에 경제 직격탄

라자팍사 가문의 부패 실정에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스리랑카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코로나19로 스리랑카의 주 수입원이던 관광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스리랑카의 외국인 관광객 수는 2018년 기준 230만명에 달했지만, 사람의 왕래가 끊기면서 관광 수입과 송금액이 격감했다. 

게다가 외채 상환이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 급등과 세계적 인플레이션까지 겹치자 스리랑카 경제는 수렁에 빠졌다. 생필품 부족과 연료난으로 국민들은 민생고를 겪게 됐다. 

스리랑카는 지난 4월 510억 달러(약 66조 2000억원) 규모 대외 부채 상환이 어려워지면서 ‘일시적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이후 국채 이자 7800만 달러(약 1000억원)에 대한 30일 지급유예 기간이 만료된 뒤에도 이자를 내지 못해 지난 5월 18일 공식적으로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아시아에서 디폴트는 1999년 파키스탄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스리랑카는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디폴트에 빠진 아시아 국가가 됐다. 

경제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20년간 집권해온 라자팍사 가문의 ‘부패한 독재’를 비판하며 라자팍사 가문의 정계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국민의 여론이 악화하면서 라자팍사가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마힌다는 지난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라자팍사 가문 출신의 장관 3명도 사퇴했다. 

그럼에도 시위가 격화하자 고타바야가 새로 임명한 라닐 위크레메싱게 총리가 먼저 사퇴 의사를 밝혔으며, 잇따라 고타바야 역시 13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오는 20일 열릴 국회 의회까지는 사임한 고타바야를 대신해 당분간 국회의장이 대통령 대행을 수행하게 되지만, 스리랑카 정국의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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