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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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이윽고 명나라가 참전해 국제전쟁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보는 한·중·일의 시각은 서로 다르다. 명칭부터 다르다. 우리가 쓰는 임진왜란은 ‘임진년(1592년)에 왜인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동’이란 의미이다. 이는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가득한 용어이다. 참고로 북한은 임진왜란을 ‘임진 조국 전쟁’이라 부른다.

반면에 일본은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부른다. ‘문록’은 1592년부터 1595년까지, ‘경장’은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다. 이는 ‘문록 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일견 중립적인 용어인데,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이후부터 사용했다 한다.

19세기까지 일본은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이라 불렀다. ‘조선을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는 의미이다. 여기엔 조선에 대한 멸시와 일본의 우월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활했고 교토에 풍국신사가 세워졌다.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 천수각에는 지금도 임진왜란이 ‘Korean Campaign’이라고 번역돼 있다. 일본의 내심이 드러난 번역이다.

한편 중국은 임진왜란을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만력은 임진왜란시 명나라 황제의 연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항왜원조(降倭援朝)’를 더 선호한다. ‘일본에 대항해 조선을 도왔다’는 이 용어에는 은연중에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중국은 1950년에 중공군이 참전했던 6.25 전쟁을 ‘항미원조(降美援朝)’라 부른다. ‘항왜’에 이어 ‘항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대해 중국이 번국(藩國) 한국을 도왔다는 역사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지금도 중국은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다. 동북공정에서 시작해 한복·김치·판소리까지 중국 것이라는 문화침탈이 그 사례이다.

학자들은 3국의 공통 용어로 ‘동아시아 7년 전쟁’ ‘임진전쟁’을 제시했지만 호응이 별로 없다.

요컨대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를 250년간 지속했고, 중국에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으로 섬겼다. 선조는 이순신과 의병의 공을 애써 폄하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친명(親明)으로 일관했다. 이러자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췄고 두 왕자와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1644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했다. 그러나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고 유명조선(有明朝鮮)을 외치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면했다.

임진왜란을 징비(懲毖)하자. 단재 신채호가 말했듯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이제 2016년 9월부터 연재한 ‘역사이야기’를 마친다. 그동안 졸고를 읽어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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