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1591년 3월, 일본을 다녀 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접견했다.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1590년 7월 22일에 교토에 도착해 11월 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했다.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약(賜藥)’이란 제도는 봉건시대 극형에 처해지는 범죄자에게 내린 형벌 중 하나였다. 고대 중국에서도 왕족이나 여인들 사대부들에게 이 제도가 적용됐다.당나라의 운명을 흔들었던 양귀비도 현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사약을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성난 민심과 측근 장수들의 겁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명을 내린 것이다.조선왕조 시기에는 사약을 받은 여인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성종 비 윤씨와 숙종 대 장희빈이다. 연산군의 연인이었던 기생 출신 장녹수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가르치는 자는 많으나 참 스승이 없다’는 말은 멀리 공자 시대에도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다운 스승을 찾을 수 없다는 한탄이 등장하는 것일까. 스승도 인간이라 도리(道理)보다는 권력이나 물욕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유교사회에서 제자에게 감명을 준 스승은 산속에 살았다. 한양 근교로 낙향했다가 관직을 제수하면 서둘러 떠나는 학자들은 존경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학문이 깊은 학자일지라도 벼슬지향적이면 올바른 스승의 반열에 오르기 어려웠다.조선 명종대 속리산에 은거한 대곡(大谷) 성운(成運)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과거 유교국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黨爭) 때문이었을까. 국가의 운명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치열했던 시기에는 백성들의 삶이 보다 편했다는 이론도 있다. 서로 상대 당을 의식, 임금에게 신임을 얻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 머리를 싸맸기 때문이다.그러나 당쟁의 폐해는 태산 같았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스승과 결별하고 친구나 학우의 의리마저 팽개쳤다. 반역의 기치를 들다 삼족이 멸문 당하는 화를 입기도 했다.조선 숙종대 노·소론 간 분쟁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당쟁의 산물이었다
지난 2일 충북 보은군의 한 농가 젖소가 구제역 의심 증세를 보여 역학 조사결과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 후 6일에는 전북 정읍에서, 8일에는 경기 연천에서 구제역이 발생했고, 당초 발생지 보은군의 다른 농가에서 사육하던 한우가 또 다시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는 등 구제역 파동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전국에서 발생된 조류독감(AI)으로 닭·오리 등 총 3314만 마리가 살처분되는 와중에서 구제역까지 겹쳤으니 농림축산식품부와 시도 방역기관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AI에 이어 구제역이 또 다시 발생했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말 영국인 비숍 여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선인의 습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작은 조랑말을 끌고 다녔다. 그녀가 매우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 바로 조선인들의 식습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차린 음식상과 특히 쇠고기만큼은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많이 먹는 풍속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이 시기 조선에 온 프랑스 신부 다블뤼 주교도 풍속을 적어 본국에 알려주었다. 1895년 파리에서 간행된 ‘다블뤼의 비망록’이란 책에 조선 후기 풍속도가 기록돼 있다. 다블
사상 최악의 AI(조류인플루엔자) 사태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젖소와 한우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소는 물론 소보다 3000배나 전염력이 높은 돼지에게도 전염될까봐 정부와 농가가 방역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혈세 수조원을 들이붓고도 11개월 만에 다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방역체계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농식품부는 작년 10월부터 올 5월까지가 ‘구제역 특별방역대책기간’이고 작년 말 기준으로 소는 97.5%, 돼지는 75.7%의 백신 항체 형성률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전통적 양조 기술은 자연의 향을 담아낸 것이 특별하다. 이른 봄 진달래를 따 담은 것이 두견주, 가을날 이슬 맞은 국화잎을 띄운 것이 국화주다. 봄, 여름, 가을 자연의 향초를 찾아 발효시켰으니 이처럼 자연 친화적 술들을 세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고려 사람들은 술을 매우 사랑하여 많은 종류를 만들었다. 이규보의 시 속에는 이화주(梨花酒), 자주(煮酒), 화주(花酒), 초화주(椒花酒), 파파주(波把酒), 방문주(方文酒), 춘주(春酒), 천일주(千日酒), 천금주(千金酒), 녹파주(綠波酒) 등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시대 화가들은 여자들의 모습을 즐겨 그리지 않았다.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유일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소녀티를 갓 벗은 여인은 트레머리에 동그란 얼굴로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을 가졌다.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수에 차있다.근세에 와서 여권이 신장되자 궁정화가였던 이당 김은호 화백이나 그 제자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 대가들이 미인도를 잘 그렸다. 보기 드문 절색의 여인을 그린 것이라서 미인도는 인기가 있었다. 한때는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바쁜 일상에서 큰마음을 먹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지역을 다니며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 날 32년만의 폭설로 인해 나의 발은 제주에 묶여 버렸다. 그리고 만나게 된 여성독립운동가 유족.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던 유족의 눈빛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머니는 나에게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남겨 주셨어요. 제가 지금 어린이집을 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했던 고수선 여
최상현 주필 지방 나들이에 나선 그날은 하필 어느 토요일이었다. 주말인지라 고속도로를 빽빽이 매운 각양각색의 차량들이 엉금엉금 길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은 ‘서해고속도로’였다. 우리는 동종(同種) 업종에 종사했거나 종사 중인 선후배들과 그중 일부가 모시고 온 가족들까지를 모아 단출하게 나들이 일행을 구성했다. 우리를 태운 대형버스 역시 길바닥에 배를 깔고 힘들게 숨을 헐떡였다. 속 시원하게 공중으로 휘익 날아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밀리는 길에서도 우리는 3시간 이상을 조바심을 내지 않고 매연을 들이키며 태연히 버티었다. 그런 가
최상현 주필 이순신이 죽고 난 후에는 다양한 관직들이 추증되고 시호(諡號)도 내린다. 그가 죽은 바로 뒤에는 선조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고 1604년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錄勳)된다. 인조 때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리고 숙종 때인 1706년엔 유생들의 발의에 의해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정조 때인 1793년엔 드디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영의정이 추증되고 1795년엔 정조의 명에 의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된다. 이처럼 세월이 갈수록 이순신의 공적과 이름은
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프로야구에서 광주와 전라도를 연고지로 한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목포의 눈물’과 ‘남행열차’가 대표적인 응원가였다. 팀 이름도 바뀌고 관중들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흘러간 노래가 되고 말았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명곡들이다. ‘남행열차’는 발표된 지 30년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노래방 인기 순위에 들 정도로 자주 불리고 있다. 하지만 ‘목포의 눈물’은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아득한 시절의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김수희가 1986년에 발표한 ‘남행열차’는 1956년 손인호가 부른 ‘비
이재준(칼럼니스트·대기자) 중국 복건성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曲)은 기묘한 경치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 명승은 송나라 주자(朱子)의 고향으로 그가 노래한 ‘무이구곡가’는 불후의 명시로 회자된다. 1곡에서 9곡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소회가 절실하여 신선의 경지에 빠지게 한다.옛 조선의 석학들이 경승지에 구곡(九曲)을 지어 찬탄한 것은 주자의 멋진 유풍을 닮으려 한 때문이다. 전국에는 구곡이름이 붙여진 경승지가 많으며 퇴계는 도산구곡을, 율곡은 고산을 사랑하여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괴산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너도 나도 통일운동에 뛰어드는 일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무슨 ‘상품’ 쯤으로 생각하는 ‘잡상인’들까지 끼어드는 일은 서글프다. 통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민족사다. 너도 나도 함께할 수는 있지만 간혹 통일을 핑계 삼아 생계를 해결하려 든다면 이는 차라리 물러나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독립운동 당시 너도 나도 독립을 외쳤지만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독립을 얻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남녀노소 한결 같이 통일을 말하지만
최상현 주필 우리나라에 유난히 많은 망부석(望夫石)에 관한 전설은 감동을 받기에 앞서 너무 애처롭게 느껴지는 얘기다. 먼 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 남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기다리던 자세 그대로 돌로 굳어져 서 있게 됐다는 얘기이니까-. 사람이 돌로야 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구월심(日久月深) 길 떠난 남편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여인네의 절개에 관한 얘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얼마든지 리얼 스토리(Real story)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망부석은 전국 여러 곳에 선재해 있다. 그중에서 경남 울주군 치술령의 망부석은
당나라 태종 때에 원수성이라는 유명한 점술가가 있었다. 그가 점을 치면 백발백중 맞추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근방의 어부들에게는 신과 같은 추앙을 받았다. 그가 점쳐준 곳으로 가면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의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다.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결국 용왕도 알게 됐다. 용왕이 가만히 생각하니 물고기의 씨가 마르게 생겼다. ‘점술을 배워서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데 쓰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그래서 원수성을 찾아가 날씨 맞히기 내기를 했다. 내일 비가 오겠는가 안 오겠는가를 맞추는 내기였다.원수성이 “내일 10시에
정라곤(논설위원, 시인)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가 있으니 바로 정읍사(井邑詞)이다. 그 내용은 정읍현(井邑縣)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시장에 가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므로 혹시 밤길에 해(害)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노래는 부인이 남편을 위하는 노래지만 옛 가사(歌詞)문학을 들춰보면 부모가 자식을, 임금이 백성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아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게 다반사이다. 상대방을 위하는 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상대방을 위하여 배려하고 걱정해줌은 미덕이어서 좋다. 특히 사회
1898년 영학당의 흥덕항쟁은 이화삼의 체포로 막은 내렸지만 동학의 저항정신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듬해 1899년 동학혁명의 무대였던 호남지역에서 재현되었다.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영학당은 동학혁명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영학당의 기포는 정읍의 최익서가 주도하였다. 최익서는 동학혁명 당시 손화중의 연원에서 활동하였다. 최익서는 처음에 부안대접주로 활동하였던 김낙철과 함께 기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낙철은 동학혁명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기포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여 참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