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 대접받는 이는 영국인 출신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다. 무려 그림 한 점 가격이 1천억원을 상회한다.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술가의 자화상’이 1020억에 낙찰됐다. 수영장 풍경을 곧잘 그리는 호크니는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그림을 뛰어 넘는 가격의 고화가 있다. 2015년 고갱(Paul Gauguin, 1848 ~ 1903)이 타이티에서 그린 작품인 ‘언제 시집 갈래’는 3억달러(약 3천억)에 카타르 왕가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지난 주 미국 대통령 최초로 북한 땅을 밟은 트럼프의 ‘영광’ 뒤에서 들려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비극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의 동결이라는 ‘참상’의 무대 뒤에서 재선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동결’이라면 이건 완전히 다른 말이다. 즉 단지 체제보장을 넘어 미국과 북한이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요, 이는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선포하는 대사건이다. 현재도 미국과 북한의 후견국가 중국은 심각한 무역전쟁을 진행 중이다. 이번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밑바닥엔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19세기 말 조선을 보면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탐관오리는 때를 만났다는 듯이 좋아했다. 조정은 썩어 문드러진 탓에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도 못하고 권력 유지에 급급했다.19세기 100년 동안 백성들이 “못살겠소! 제발 살게 해주시오!”하고 들고 일어나면 역모로 몰아 목숨을 빼앗거나 노비로 삼았다. 조정이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어 토벌할 수 없거나 토벌을 하기엔 힘이 모자랄 때만 달래는 ‘위무 공작’을 벌였을 뿐이다.세계정세가 어떻게 바뀌는지 인식하려 하지도 않고 인식할 능력도 없는 군주 고종과 왕후 민씨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다산 정약용(1762~1836)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목민심서(牧民心書)』이다.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1801년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다.1803년 가을에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 시를 지었다. 낳은 지 사흘 밖에 안 된 남자아이와 상복 벗은 지 오래된 시아버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 아전은 군포세(軍布稅)를 안냈다는 이유로 소마저 끌고 갔다. 그러자 농부는 자기 물건을 잘라버렸다.1809년과 1810년에는 흉년이 들었다.
신림은 원주의 동남쪽지역이라 옛 원주의 관아에서 평창, 영월을 거쳐 영동지방과 제천 등 충북 북부지역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장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발행된 원주읍지에는 단구역서 가리파재를 넘어 신림역과의 거리는 40리이다. 신림역에는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과 짐을 실을 수 있는 말 목마 3필과 노비 31명이 있었다.가리파재 인접한 백운산 줄기 이재와 찰방망이, 옛날 관행길 예찬이 강안이, 역골, 또는 조선시대 군량을 저장한 창고가 있었다는 둔창, 신림으로 이어진다. 신림은 구을파면, 1895년 가리파면, 일제강점기던 19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곡산에 보민고(補民庫), 고마고(雇馬庫), 보폐고(補弊庫), 군수고(軍需庫), 칙수고(勅需庫),군기고(軍器庫), 양현고(養賢庫) 등의 관고(官庫)가 있었는데 모두 그 절목(節目)을 바꾸었다.매년 마땅히 써야 할 물건을 절목에 따라 지출하고 장부에는 기록하지 못하게 했으며, 뜻밖에 별도로 지출되는 물건에 대해서만 장부에 정리를 하게 했는데 이렇게 되다 보니 아전들이 예전같이 농간을 하지 못하게 됐으며, 연말에는 각 창고에 남은 재정이 500~600 꿰미나 됐으니 적은 곳이라도 수십 꿰미는 됐다.정약용은 곡산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난세에 또 다른 축의 최명길(주화파)과 달리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청과 항전할 것을 굽히지 않았던 주전파의 대부 김상헌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읊은 시조다.시대는 달라도 선조와 광해 그리고 인조의 정치외교사를 통해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사색당파 즉, 동인과 서인, 남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약용(丁若鏞)이 금정촬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는 계기가 됐던 을묘박해(乙卯迫害)의 전모(全貌)를 소개한다.1794년(정조 18) 청나라 출신의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어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관문을 통과한 이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걷기를 12일 동안 반복하다가 그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정월초에 서울에 도착했다.이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천주교회 교세는 전국적으로 신자수가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이병진 한국외대중국연구소 연구위원 제목은 중국과 백두산이지만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 한국과 통칭이 다르다. 이름도 다르지만 뭔가 백두산에 대해 중국은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일반 중국 인민들은 백두산이 중국 것 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예 관심 없는 사람이 많지만 중국 것이라고 당연히 여긴다. 조금 배운 사람들은 다르다. 백두산이 원래 중국 것인데 양보해서 반 이상을 떼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유학할 시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같이 공부했던 동료 중에 지도교수가 똑같아 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9세라는 어린 연령에 모친을 잃은 사암(俟菴)이었지만 큰형수가 되는 정약현(丁若鉉)의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모친의 역할을 대신해 줬는데 사암은 당시의 상황을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墓誌銘)” 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몇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니, 약용이 그때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해주었다. 그러나 약용은 몸을 흔들며 벗어나려고만 하면서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형수는 빗과 세숫대야를 들고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우리처럼 과거집착에 강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혁이나 혁신이 성공한 경우가 별로 없다. 오랜 전통을 보전한 대견함은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도전해 성공하는 역동성은 떨어졌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수용하지 않은 실패는 대표적인 예다. 실학의 주 이념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다. ‘이용(利用)은 장인(匠人)이 그릇을 만들고, 장사가 재물을 운반하는 것 등을 말하며, 후생은 넉넉한 삶’이란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위 ‘이용후생’ 학파는 성역불가침이었던 조선 성리학의 시대착오적 문제점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8세기 후반 조선에는 사진기가 없었다. 삶의 모습을 담아낼 수단이 전무했다. 화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속화(俗畫), 즉 풍속화였다. 18세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된 한 청년은 인물을 잘 그렸다. 스승들의 놀이에도 나가 풍류를 그렸다. 젊은 화가는 한양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정교한 필치로 시대의 생활상을 담아냈다. 임금의 영정을 그리는 화원이었지만 귀족의 삶보다는 서민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민초의 삶에 묻어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인의(仁義)를 담아낸 것이다.화가는 조선 후기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19세기 말엽 러시아가 일본·청나라와 함께 조선에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조선과 러시아의 외교관계는 본격화됐다. 양국은 1884년에 조·러 통상 조약을 맺었고, 고종 황제가 러시아 대사관에 피신한 사건(아관파천; 1896~97년)을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에 강한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조선과 러시아 양국의 국교는 단절됐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 대표팀이 참가해 종합 1위를 차지한 후, 한국과 소련 양국은 1990년 9월 30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북방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유교사회에서는 성인식이었던 관례(冠禮)를 매우 중요시 했다. 고기에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이었다고 하니 천수백년 역사를 지닌 셈이다. 세자가 되거나 미성년자가 왕위에 오를 때는 반드시 관례를 치른 다음에 즉위식을 할 수 있었다. 관례는 20세에 치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조혼 풍속으로 12세에 서둘러 관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가의 소년들은 관례를 치른 후에는 관을 쓰고 여자는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어른이 된 것이니 정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백제는 아니러니 하게도 국력이 제일 커지는 시기 멸망했다. 왕도를 소부리로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친 1백년은 그야말로 도약의 단계였다. 그러나 안보의지는 매우 열악했으며 부여는 대군을 막아낼 험난한 요새가 없었다. 설마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왕도를 침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구려는 수나라 1백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자부심으로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부결속이 완화되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노련한 전술가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이 권력 투쟁을 하다 나라를 잃었다. 임진전쟁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3월 29일에 뉴욕타임스(NYT)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유관순’이라는 제목으로 유관순(1902∼1920) 열사 부고 기사를 냈다. 유관순의 부고 기사는 ‘간과된(Overlooked) 여성들’이란 제목 아래 인류역사에 공헌한 여성 15명에 대한 소개의 일환이다. NYT는 1851년 창사 이래 부고기사는 주로 백인 남성이었음을 반성하면서, ‘제인 에어’를 쓴 영국의 소설가 샬롯 브론테(1816~1855)를 필두로 중국 청나라 여성혁명가 추진(1875∼1907) 등의 부고를 실었다. 이렇듯 여성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성 여행길에 공자를 찾아갔다. 명대에 지은 공부대문은 곡부시내 중심에서 남향으로 서있다. 5개의 대들보를 3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용마루는 회색기와로 지붕은 짐승모양의 기와로 덮었다. 건물의 모습은 비교적 평탄하고 단순하며, 사용된 자재도 심플하다. 전체적인 구조나 외관에서도 명대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간마다 하나의 문이 있으며,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무늬를 칠했다. 대문 정중앙에는 남색바탕에 황금빛 글씨로 쓴 ‘성부(聖府)’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의 기둥에도 역시 남색 바탕에 황금
박상병 정치평론가 정말 깜짝 놀랄 일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전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것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예약해 놓은 상태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부인과 함께 먼저 중국을 찾았다. 물론 그간의 과정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됐다. 특별열차가 국경을 지나 베이징으로 향하고 있을 때도 그 열차에 누가 탑승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한미관계와 마찬가지로 북중관계도 ‘혈맹관계’이다. 이번에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한목소리로 ‘혈맹’을 말한 것도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북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문화와 정치는 기묘한 관계이다. 중국의 고대 군왕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지극히 일반적인 것을 특수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지식인의 문장과 글자에 생트집을 잡아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켰다. 요즈음도 문화권력이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고대사회에서 문화의 힘은 정치권력과 함께 국가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었다. 양자는 필요에 따라서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지만,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피나는 투쟁을 펼친다. 외형적으로는 정치권력이 문화권력에 간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정열 한국안보통일연구원장/북한학박사 평화로운 평창동계올림픽이 예상되는 가운데, 북한은 대규모의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고, 미국은 대북압박을 지속하고 있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올림픽 대화만으로 북핵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대화기류가 흘러도 밑에 핵전쟁이 도사리고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서로 치열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안보’는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산소’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보험료다. 특히 평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