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백제는 아니러니 하게도 국력이 제일 커지는 시기 멸망했다. 왕도를 소부리로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친 1백년은 그야말로 도약의 단계였다. 그러나 안보의지는 매우 열악했으며 부여는 대군을 막아낼 험난한 요새가 없었다. 설마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왕도를 침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구려는 수나라 1백만 대군을 격파했다는 자부심으로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부결속이 완화되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노련한 전술가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이 권력 투쟁을 하다 나라를 잃었다. 

임진전쟁은 조선의 안보불감증이 빚은 미증유의 국난이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왜군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공하러 오는 줄 알았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있다. 침공 1주일 만에 한양이 무너졌다. 

임금이 피난하자 성난 민심은 궁에 불을 질렀다. 수도 한양은 약탈과 방화로 아비규환이 됐다. 무혈 입성한 일본군은 불에 타는 궁성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게 정말 우리가 문명국이라고 선망했던 조선이란 말인가.’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1636년 12월 청나라가 압록강을 넘을 때 국경수비군은 봉화를 피어 위급상황임을 알렸다. 그러나 도원수 김자점은 ‘설마 이 추운 겨울에 공격하겠는가’라고 대비하지 않았다.

청나라군은 5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으며 인조는 수어장대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결국 사수가 어려워지자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박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한 것이었다. 백성들이 당한 수난은 더 엄청났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화를 보면 임진전쟁의 안이한 안보관을 연상시킨다. 조선 지도자들은 역사의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당시 군부대신 이용익은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일본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했다. 

분단 대한민국은 북한의 침공을 생각지 못하다 6.25 동족상잔을 겪었다. 수백만명이 죽고 1천만 이산가족들은 반세기가 넘게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휴전 70년 동안 북한의 각종 도발로 인한 상처도 크다. 천안함 장병 유가족들은 아직도 눈물 속에서 산다. 얼마 전 북한 지도자나 책임자들은 판문점과 서울에 왔으면서도 우리 국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는 갑자기 평화 광풍이 조성되고 있다. 열기가 너무 팽배하여 체감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진정 남북화해와 평화를 반대할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이 살길은 북한이 진실되게 평화의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북한이 옛날처럼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문 대통령도 얘기했듯이 북한의 핵 폐기나 대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북미정상회담과 또 북-중 정상과의 협의도 남아있다. 좋은 쪽으로 기대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한국의 역사는 안보환경이 무너질 때 큰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기록된다. ‘설마’ 하다가 당한 역사의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평화기운이 조성됐다고 서둘러 안보태세를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군의 사기를 높이고 전방의 방비도 철통같아야 한다. 

평화에 대한 미사여구만 주고받는 것만이 답이 아니다. 대통령은 북한에게 핵 폐기에 대한 가시적인 절차를 강력 촉구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보일 때 그동안의 노력이 찬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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