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다산 정약용(1762~1836)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목민심서(牧民心書)』이다.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1801년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다.

1803년 가을에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 시를 지었다. 낳은 지 사흘 밖에 안 된 남자아이와 상복 벗은 지 오래된 시아버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 아전은 군포세(軍布稅)를 안냈다는 이유로 소마저 끌고 갔다. 그러자 농부는 자기 물건을 잘라버렸다.

1809년과 1810년에는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한데도 아전들은 사태 수습은 안하고 세금만 수탈했다. 다산은 ‘용산리’·‘파지리’·‘해남리’ 3리(三吏)시를 지어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노했다.

다산은 1808년부터 1817년까지 10년간 정부개혁 책을 썼다. ‘방례초본’이다. 그런데 책이 완성될 무렵 갑자기 회의(懷疑)가 왔다. “이 책을 누가 볼까? 집권당 노론이 개혁을 할까?” 다산은 책 이름을 ‘경세유표(經世遺表)’로 바꾸고 집필을 중단했다.

이후 다산은 “한 사람의 선량한 목민관이 한 고을이라도 잘 다스린다면 백성들의 시름이 덜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목민심서』를 썼다.

1818년 봄에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여름에 해배되어 고향 남양주로 돌아왔다. 1821년 늦봄에 다산은 목민심서 ‘자서(自序)’를 썼다.

“…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 …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 한 것이다.”

『목민심서』의 요체는 ‘율기(律己) 6조’이다.

“청렴은 수령의 본무(本務)로서 모든 선(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잘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아전 단속’이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징수하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아전은 지방관청의 실무 관리로 한 곳에서 평생 근무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탐관(貪官)과 함께 오리(汚吏 썩은 아전)가 날뛰었다.

드라마 ‘녹두꽃’에서처럼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전과 결탁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그리하여 1894년 음력 1월 10일에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은 4월 30일 백산 봉기 후 5월 11일에 황토현에서 승전해 5월 31일(음력 4월 27일)에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러자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1885년에 청일 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와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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