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유교사회에서는 성인식이었던 관례(冠禮)를 매우 중요시 했다. 고기에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이었다고 하니 천수백년 역사를 지닌 셈이다. 세자가 되거나 미성년자가 왕위에 오를 때는 반드시 관례를 치른 다음에 즉위식을 할 수 있었다. 

관례는 20세에 치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조혼 풍속으로 12세에 서둘러 관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가의 소년들은 관례를 치른 후에는 관을 쓰고 여자는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어른이 된 것이니 정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춘향은 단옷날 광한루에서 운명적으로 이 도령을 만난다. 춘향이 관례를 치르지 못하고 갑자기 첫날밤을 치르게 되자 어머니 월매는 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술상을 앞에 놓고 한탄가를 부른다.  

- 무남독녀 너 하나를 금옥같이 길러내어/ 봉황 같은 짝을 지어 육례 갖추어 여우자더니/ 오늘 밤 이 사정이 사차불피 이리 되니/ 이게 모두 네 팔자라/ 수원수구를 어이허리/ 너의 부친 없는 탓이로구나/ 칠십 당년 늙은 몸이 너만 의지허였더니/ 삼종지 지은 법을 쫓자허니 내 신세를 어쩔거나… -

이 도령이 월매를 항한 언약이 재미있다. 
- 어허, 장모 염려마오… 천지신명은 공증차맹이라/ 내 비록 미려하오나 아들과 같이 모실 테오니/ 아무 염려를 마옵소서… -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이 관례를 치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율곡은 슬픔이 커 상복을 벗은 후에도 1년을 더 심상(心喪)을 치렀다. 그리고 18세 가을에 관례(冠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행수기생이 유지라는 기생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술상을 들고 들어온 기생은 관례를 치르지 않은 댕기머리 소녀였다. 

율곡은 “어린 아이와 호합(好合)하면 짐승이 되겠지… 수종이나 들거라” 하며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기생 유지와는 나이가 들어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관례를 치를 때 특별히 당부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어린 세자가 비뚤게 나가지 않도록 유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탈적 삶을 살다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 넓고 굳세게 뜻을 세우며(弘毅立志)/ 너그럽고 소탈하게 사람을 다스려라(寬簡御衆)/ 공정한 마음으로 일관되게 보며(公心一視)/ 현명한 이에게 맡기고 능한 이에게 시켜라(任賢使能) -

강화도에서 가족들과 유배생활을 했던 철종은 19세에 한양으로 불려 나와 인정문에서 관례를 치른 후에 즉위했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시킨 것이다.

명필 추사 김정희는 15세에 관례를 치르고 한산 이씨를 배필로 맞았다. 그러나 한씨 부인은 추사가 20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추사는 많은 서적을 탐독, 지식을 쌓았으며 2년 후 생원시에 급제한다. 추사는 24세에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갔다. 이때 청나라 옹방강, 완원 등 대학자들과 필답으로 경학을 토론했는데 이들을 경악시켰다. 

성년의 날을 맞아 학교 기업 단체 등에서 풍성한 축하 행사들이 마련되고 있다. 지방의 한 교육기관은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전통방식으로 성년식을 치러 화제를 모았다. 성년으로서의 예절과 책무를 일깨워 주고 아름다운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성년이 되는 청소년들은 미래 나라의 기둥이다. 사회 초년생들인 이들을 예우하고 이끌어주는 기성사회의 따뜻한 배려가 따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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