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휘 한국호국문화선양 협회 사무총장 최근 심각한 갈등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중국과 일본과의 댜오위다오섬(센카쿠섬) 영토분쟁에서 보여주는 중국 군사력의 시위양상은 결코 단순한 무력시위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그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facts)이다. 13세기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출정했던 3차례 원정에서 실패했었고, 16세기 임진왜란도 결과론적으로 강화를 요청한 명나라를 보는 관점에서 패전이라고
함경도 회령의 오제암이라는 마을에 최 씨가 천하장사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 딸이 첫날밤을 지내려는데 서방한테서 노린내가 너무 나서 같이 잘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딸이 서방의 입과 양쪽 겨드랑이, 그리고 양쪽 다리가 시작하는 사타구니 안쪽에 주머니를 만들어 냄새를 막았다.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눈을 떠보니, 웬 털북숭이 수달이 자기가 만들어 묶어놓은 다섯 개의 주머니를 매달고 자고 있었다. 최 씨 딸이 그 주머니에 긴 실을 매달았다가 아침이 되어 실을 따라 가보았더니, 백두산 천지에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실을 잡아당겼더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중국의 고대 군왕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생반경투(生搬硬套)’를 적절히 혼합하여 무중생유(無中生有)를 창조하는 전문가였다. 이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문화권력을 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켰다.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화는 정치와 경제라는 하드웨어적 구조를 견제하는 유일한 힘이다. 현대사회에서 문화권력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하지만, 고대사회에서도 문화의 힘은
최근 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에서 보이는 중국의 대응전략에서 과거의 중국외교와 다른 변화를 발견해야 한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뚱(毛澤東)이 사망한 이후 실질적인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생전에 강조했던 중국의 외교노선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의미하는 바는 ‘칼집에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중국은 소련처럼 미국과의 불필요한 군비경쟁을 회피해 내실있는 외교전략을 추진했고, 그것이 1990년대 쟝쩌민(江澤民)의 ‘화평굴기(和平崛起)’라는 것이다. ‘굴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세계전쟁사에서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모래땅에서 군사력을 키워서 중국과 유라시아를 정복하였고, 중동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한 이스라엘은 4차에 걸친 중동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큰 나라가 전쟁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국론분열과 내부혼란시에 작은 나라에 패전했던 경우를 보여주는 보불전쟁(1870.7.19~1871.5.10)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장식됐다. 이 전쟁은 유럽대륙 프랑스의 독주에 종지부를 찍고 독일제국을 성립시킨 전쟁이
며칠 전엔 흔히 볼 수 있는 이기적 성격과는 사뭇 다른 시위가 있었다. 중국대사관 앞에서 연예인들과 함께 진행된 시위로 모처럼 동족애와 함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애절한 시위였다. 내용인즉, “중국 정부는 우리 형제를 북으로 보내지 말라!”는 시위가 아닌 가슴 저린 호소요 절규였다. 또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은 이를 막기 위해, 아니 정부와 국회는 이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의미 있는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도 했다.그렇다. 지금 정부와 및 온 국민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해야 한다. 탈북민의 북송문제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성립돼선 안 된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반안보세력의 농간에 무산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옛말에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처럼 건국 이래로 국가안보에 관한 무수한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금도(襟度)가 있었다면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 할 수 있다’는 국민적 합의였다. 이러한 국민적 총화단결이 있었기에 북한의 2660여 건의 침투와 국지도발에도 국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기에 북한과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중인 우리에게는 국가적 절대 가치가 바로 “국방”인 것에 이의를 제기할 세력이 없어야 함에도 일부 진보좌파세력은
6일 오후 일제가 강탈해 간 조선왕실의궤 등 우리 도서 1200책이 대한항공편으로 일본 나리타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송 보관됐다. 이번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통해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해 깊은 고찰이 다시 한번 요구되고 있다. 여기서 잠시 과거의 우리 교육정책을 한번 살펴보자. 교육과정에서 우리의 뿌리와 살아온 역사를 배우는 한국사는 불행히도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이었다. 그나마 일부 지식인들과 언론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난 4월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년부터 고교 한국사가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채택된다고 발
이병진 중국전문 대기자 매년 10월 10일은 우리나라에서 임산부의날이다. 10월의 풍요로움과 임신 10개월을 상징으로 삼아 이날을 우리나라는 임산부의날로 지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날을 잊고 지나가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10월 10일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웃의 중국에서는 쌍십절이라고도 불리는 경축일이며, 근자에 와서는 역사적 의미가 한층 중시되는 날로 양안(兩岸)의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일련의 활동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대륙과 대만
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최종병기 활’은 올해 국내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블록버스터다. 좌절을 딛고 원수를 갚는, 만화나 무협지에서 늘 보아왔던, 맥락에서 보자면 별다를 게 없는 스토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텍스트의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극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본성이 선해서인지 선한 것이 이긴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영화 같은 허구의 세상일지언정, 악한 존재가 선한 존재로부터 응징당하고 마침내 선한 존재가 승리하는 걸 보면, 선한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마음
우리는 경제성장과 나라발전이란 구호 아래 모든 것을 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얻는 것이 있었다면 더 귀하고 중한 것들이 잊히고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부정과 부패와 거짓과 왜곡은 어김없이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고, 오늘날 그 거짓은 이 세상의 주인이 돼 우리를 그 세계의 생각과 사상으로 사로잡아 길들이고 오염시켜 따르게 해왔다. 그나마 깨닫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 옛날 바벨론과 같은 화려하고 큰 성이 우리 앞에 있고,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鐵甕城)이 돼 있었다. 이 같은 현실을 누가 조장했고 누가 만들었
정수연 통섭예술인 현대미술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천후 예술가로서 중국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로 불리우는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미국의 파슨스 스쿨(Parsons School)과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스위스의 건축회사와 함께 2008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냐오차오(새 둥지)’를 설계했다. 이 건물은 그 후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건축’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렸고 그는 덩달아 유명해졌다. 설치미술가인 그는 파괴와 해체, 재구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개천절을 맞아서일까, 최근 상고사(上古史)를 재조명하는 자리가 곳곳에서 마련되고 있다. 단군신화가 아닌 단군사기 곧, 실제로 있었던 일(歷史)이라는 주장과 일본 건국신화가 우리네 역사를 바탕으로 두고 만들어졌다는 이론이 한중일 상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우리 역사는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왜곡되어 온 것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특히 중국은 본격적으로 청나라 건융(1736~1789) 때 우리 고대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켰고,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국했다며 무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째 되던 날이었다. 국민 스스로가 나라를 빼앗긴 사건을 국치, 즉 나라의 수치라고 명명했다. 이런 수치를 맛보도록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이완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국노’라는 주홍글씨가 뒤따르고 있다. 여기서 이완용은 외교권과 국권을 갖다 바친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일본과 체결했을 때 스스로 나라를 팔았다는 자각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완용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고위 공무원이자 정치인·지식인·예술인 등 당대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다른 계층 국민보다 최신 문물
과거를 외면하면 미래는 실수의 반복을 피할 수가 없다. 과거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게 되면서 이민과 식민지 개척의 행태를 배우게 된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게 된 그 배경에는 임진왜란 때 약탈하여간 우리의 앞선 도자기 생산 기술이 있었다. 일본은 1871년 명치유신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를 대표로 ‘이와쿠라구미사절단’을 파견하고 미국과 영국으로 대거 자국민의 유학이민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남미지역의 칠레와 볼리비아 등에서 지금 일본인들의 발판이 단단한 것은 명치유신 이후 체계적인
간도는 한반도 국토의 3배에 달한다. 중국은 지금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간도를 영원한 자기들의 땅으로 확정짓기 위한 흉계이다. 나아가 북한이 붕괴되거나 한국과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해 북한 땅까지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 번역한 책에 만리장성을 우리나라 평양까지 그어 놓고 자신 조상들이 지배한 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중국 정부는 지금 조선족에게 ‘삼관교육’이란 걸 시키고 있다. 첫째, 조선의 역사는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
그림의 기원은 흔히 우리 현생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게 문화인류학계의 보편적 견해다. 동굴에서 원시적 혈거(穴居)생활을 할 때부터 인간은 선천적 표현욕구나 주술적 기원의 한 표출수단으로 그림, 혹은 상형문자를 동굴 벽에 남겼다. BC 15,000~BC 10,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럽 알타미라나 라스코지방 동굴벽화는 구석기시대 인류의 수렵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물로 유명하다. 역시 저 찬란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보듯 그림은 당대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임과 동시에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문화의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현재 우리나라 국경으로부터 하얼빈을 훨씬 넘어선 흑룡강 일대까지를 말한다.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대한제국을 침략한 후 고종황제가 국새도 누르지 않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간도를 관리하기 위해 파출소까지 설치했다. 그때까지도 간도는 대한제국 땅이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에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 조건으로 간도조약을 체결해 저희 마음대로 우리 땅을 주고받았다. 주권국을 제외한 채 제3국끼리 체결한 영토의 양도는 무효라고 국제법에 명시되어 있다.
Ⅲ. 간도영유권 100년 시효설의 두 의미간도영유권 ‘100년 시효설’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며, 양자의 의미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고 혼동하여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1. 조약무효 주장 100년 시효설‘조약무효주장 100년 시효설’은 하자있는 조약은 그 조약체결 이후 100년이 경과되면 시효가 완성되어 그 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시효설을 말한다. 예컨대, 서울특별시 의회의 ‘간도협약의 원천무효에 따른 파기촉구 결의안’의 ‘국제법상 조약은 하자가 발생하더라도 체결 후 통상 100년이 지나면 확정되므로 늦어도 조
고려 예종 10년(1115년)의 기록에 의하면, 생여진(生女眞)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금나라를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평주(平州)에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에 거주했으며 이가 금의 시조라 하였고, 또는 평주 승 김행의 아들 극기가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고을(古乙)이고 태사가 되었다. 고을이 낳은 아들 활라(活羅)도 태사를 이었다. 활라는 많은 아들을 두어 장자가 핵발리고 계자(季子)를 영가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이어서 중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장자 오야속이 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