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7)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곡산에 보민고(補民庫), 고마고(雇馬庫), 보폐고(補弊庫), 군수고(軍需庫), 칙수고(勅需庫),군기고(軍器庫), 양현고(養賢庫) 등의 관고(官庫)가 있었는데 모두 그 절목(節目)을 바꾸었다.

매년 마땅히 써야 할 물건을 절목에 따라 지출하고 장부에는 기록하지 못하게 했으며, 뜻밖에 별도로 지출되는 물건에 대해서만 장부에 정리를 하게 했는데 이렇게 되다 보니 아전들이 예전같이 농간을 하지 못하게 됐으며, 연말에는 각 창고에 남은 재정이 500~600 꿰미나 됐으니 적은 곳이라도 수십 꿰미는 됐다.

정약용은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재임중에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했으며, 4회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홍역(紅疫)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처방을 기록한 의학 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사암(俟菴)의 여러 자녀들이 홍역으로 요절했다는 점도 이러한 책을 저술하는데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었으며, 1798년(정조 22) 12권의 책을 완성했다.

그 해 겨울, 본부(本府)의 좁쌀을 돈으로 바꾸어 올리라는 영을 철회해주도록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1799년(정조 23) 2월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로 제수하는 교지를 받았는데, 정월에 청나라 고종황제가 붕어(崩御)하여 칙사가 오자 조정에서 황주까지 사람을 보내지 못해 현지에서 가까운 수령에게 직함을 높여 주고 칙사를 맞이하는 우리측 접빈사(接賓使)로 삼은 것이다.

당시 중국 사신을 맞는 일은 쉽지 않아 외교 의전에 밝은 사람이 아니면 큰 낭패를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칙사 접빈을 할 수 없었는데 사암은 그런 일에도 밝아 접빈사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3월에 사암을 황해도 목민관(牧民官)들을 염찰하라는 암행어사로 제수했으며, 영위사로서 황주에서 50일 동안을 머물며 도내 목민관들의 잘못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에 앞서 도내에 두건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밀히 상주했던바, 정조가 감사에게 유시(諭示)하여 조사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사암을 차출하여 조사케 하여 두 옥사가 전부 해결됐으며, 사암은 4월 24일 곡산도호부사의 임기를 성공리에 마치고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됐다. 상경 도중인 5월 초4일에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됐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옮겼으며 입성한 5월 초5일에 또다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됐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