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636(인조 14)년 8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朝廷)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대립됐다. 석호(石湖)의 부친 윤황(尹煌)은 척화의 주창자(主唱者)였으며 그 또한 척화를 주장하는 계차(啓箚)를 올렸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 이후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결국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문거는 병자호란 때 부친을 따라 어가(御駕)를 호종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병(餠) 중에 찐 것을 증병(蒸餠), 구운 것을 소병(燒餠), 기름에 튀긴 것을 유병(油餠), 국물에 삶은 것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다. 증병(蒸餠)은 취병(炊餠)으로 부르기도 했다. 송(宋)대 조언위(趙彦衛)는 ‘운록만초(雲麓漫抄)’ 권2에 “이여인종어명동음(以與仁宗御名同音) 인종(仁宗)의 이름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송 인종의 이름은 조정(趙禎)이다. ‘청상잡기(靑箱雜記)’ 권2에는 “인종의 묘휘(廟諱)인 ‘정(禎)’을 자칫 잘못 발음하면 증(蒸)과 비슷해 지금 내정(內庭)의 상하에서 모두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8월 29일은 국치일이다. 100여년 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참으로 부끄러운 날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이날의 분위기는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한일합방조약’에 대해 원천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사악함, 그리고 조선의 무능한 임금과 사리사욕만 챙긴 매국노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고 왜 우리는 나라를 뺏기는 수준의 나라였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본에 당했다고 해서 일본만 경계하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면 그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이윽고 명나라가 참전해 국제전쟁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추사 김정희 선생은 18세기 말 조선의 진정한 한류였다. 20대 초반에 이미 천재적인 지식으로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회자됐다. 대학자 옹방강은 처음 만난 젊은 추사를 필담으로 대면하고 ‘동국 제일가는 경학자’라고 칭찬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이 정도면 나이 든 학자들은 과연 어떠할까.’추사는 일찍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학문을 펼치고 싶었다. 중국을 다녀온 후에도 계속 연경을 찾아가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원했다. 그러나 이 꿈은 정적들의 참소로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필자는 전국에서 수선
조맹기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명예교수‘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해,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사용했다. 과연 윤 대통령이 개인 ‘자유의 무게’를 성찰하고, ‘개체적 자아’를 늘 묵상하고 살았는지…. 그의 지금까지 삶이 다수 폭력, 폭정의 ‘반지성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현대 개념의 자유는 영국인 존 스튜어트 밀(J.S. Mill, 1806)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명료하게 표출됐다. 청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출간 그해인, 1859년
김원길 국가상징물연구가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여야는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약한다. 윤석열, 새 정부는 광화문이 아닌 용산으로 추진한다. 청와대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은 이 문제로 연일 공격했다. 청나라·일본군 주둔지니, 이전 비용과 고도 제한, 군인아파트 이사까지 거론하면서 말이다. 방송토론자는 수긍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논의하자는 내용으로 선회하며 미룬다. 구중궁궐이 된 청와대는 조선왕조 광화문보다 사대주의 극복 우주로 용트림하는 용산시대의 수직상승을 국민은 응원한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면서 휴식처로 만드는 발상은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조선시대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자리에서 먹는 자릿조반(早飯)이 있었고, 아침식사를 의미하는 조반(朝飯), 한 낮에는 아침이나 저녁에 먹는 것처럼 푸짐하게 먹었을 때는 점심이라 하지 않고 따로 ‘주반(晝飯)’ ‘오반(午飯)’이라고 불렀으며, ‘낮밥’이라며 ‘점심(點心)’과 구분했다. 궁중에서는 ‘주반(晝飯)’과 달리 ‘점심(點心)’이라고 하는 ‘낮것상’은 주로 다과나 국수로 간단하게 올렸다. 그리고 저녁밥(夕飯)과 야식(夜食)이 있었다. 물론 필자가 어렸을 때인 50~60년대 만해도 집에서 일꾼
조맹기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명예교수 ‘검수완박’ ‘방송통신위원회법 일부 개정안’ 등으로 국회 안팎이 소란스럽다. 국회가 소란스러운데 국민이 마음 편할 일이 없다. 국회는 국민의 여론이 수렴되는 곳인데, 국민 여론은 고사하고, 특권 지키기 대리전을 펴고 있으니, 제대로 된 국회, 제대로 된 대한민국이 운영될 이유가 없다. ‘국민행복’은 저 멀리 가버렸다. 공직자가 특권 지키기 하면 국민행복뿐 아니라, 나라꼴이 우스워진다. 문재인 정권 5년은 국회를 홍위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옛말에 ‘배고픈 것은 참는데, 배 아픈 것은
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중국 상하이가 사실상 멈췄다. 제로 코로나19 정책 때문이다, 중국말로 칭링(淸零)이라고 말하는 본 정책은 소위 위드 코로나19 정책과는 정반대다. 글자 그대로 한 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책은 확산 방지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면에서 이해는 하지만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내세웠기에 그 결과가 미치는 파장이 한국을 비롯한 국제적으로 너무 크다. 2020년 9월 서방이 한참 확산일로에 있을 때 중국은 방역수훈자 대회를 열고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코로나19 전쟁에서 중대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1905년 11월 18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틀 후인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황성신문’이 경성 곳곳에 배포됐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이 쓴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5조약 체결 전말’이 실렸다. 먼저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어보자. “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해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인조(仁祖)의 이러한 교서(敎書)가 귀국길에 오른 청 사신의 조선인(朝鮮人) 통역관(通譯官)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사건이 확대일로(擴大一路)의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통역관을 통하여 이 교서를 전달받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는 귀국한 이후 이러한 상황을 청태종(淸太宗)에게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인조의 교서를 읽은 청태종은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전쟁을 할 바에야 조선이 대응을 하기 전에 신속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속도전(速度戰)을 결행(決行)했다. 청태종이 마침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31(인조 9)년 인조(仁祖)가 승지(承旨) 강홍중(姜弘重)을 통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조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경기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소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이원익은 1634(인조 12)년 1월 29일 향년(享年) 88세를 일기(一期)로 90 평생의 생애를 마쳤는데 청렴(淸廉)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를 따지기 전에 진리라 함이 옳다. 왜일까. 지나온 역사 속엔 반면교사 즉,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오늘과 내일의 미래를 열어 줄 청사진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또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이라 했다. 이는 ‘내가 참으로 알 때 비로소 보인다’는 이면적 차원의 뜻이 담겨 있다. 즉, 역사가 남긴 문화재(문화유산)를 진정 알고 깨닫기 위해선 그 역사의 진면목을 온전히 알고 난 후에 문화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지난 2월 하순 러시아의 침공 이래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국외 피신 제의를 거절하고 국민적 저항을 이끌고 있다. 간간이 우크라이나 측의 작은 승전보도 들려온다. 이런 가운데 유럽연합 및 미국 의원들을 상대로 격정적인 화상 연설도 했고 러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심리전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사태를 부추겼던 앵글로색슨 국가들과 매체들은 푸틴을 악마화해 국제사회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을 찍고 젤렌스키는 ‘영웅’으로 띄우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제 국제사회에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1898년 9월에 무술변법이 좌절되자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1873~1929)는 1910년 9월 14일 상해에서 발행한 ‘국풍보’에 ‘조선 멸망의 원인’을 게재했다. 글은 계속된다.“조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 벼슬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번에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청나라 건륭제의 여름별장 ‘열하’를 사신의 종사관으로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일기를 쓰면서 당시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비록 군사력으로 조선을 강점했으나 청국의 문화가 낮은 것을 폄하한 것이다.연회석에서 주고받은 화답 시에 ‘일월(日月=明)’이란 글자마저 꺼리는 중국 사대부들 앞에서 조선의 젊은 외교사절들은 수준 높은 학문을 가지고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당시 청나라는 주변 제후국 가운데 조선의 사신들을 최고로 대우해 줬고, 좋은 숙소를 배정했으며 항상 제1번 순위로 황제를 만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모든 역사는 현대사다(이탈리아 역사철학자 크로체, 1866~1952).”전라도 강진에서 17년간 유배 중인 정약용은 1817년에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이렇게 적었다.“그윽이 생각건대 대개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는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이로부터 100년도 못 돼 조선이 망했다. 1910년에 조선이 왜 망했나? 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양계초는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 자신’이라고 말했다.180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9월 14일에 중국의 개화사상가 양계초는 ‘일본병탄 조선기’를 썼다. 이 글은 64페이지에 달하는 장문(長文)이다(량치차오 지음,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p106~170).양계초는 1868년부터 1910년까지 40년간의 조선의 멸망 과정을 4단계로 분석했다. 제1기는 메이지 유신과 청일전쟁, 제2기는 삼국간섭 이후 러일전쟁, 제3기는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의거, 제4기는 1910년 망국이었다.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을 개방시킨 일본은 1884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