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중국의 세계적인 명감독 장예모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야제에서 세계를 놀랄만한 퍼포먼스, 군무(群舞)를 보여줬다. 지금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고대 복장을 한 소녀들이 지물(持物, 검 혹은 피리 등)을 들고 추는 느린 춤이었다. 음악에 맞춰 정연하게 움직이는 군무는 고대 춘추시대로 여행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대체 장 감독은 장중한 춤의 모티브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일설에는 그가 한국을 방문, 종묘제례악의 ‘일무(佾舞)’를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퍼포먼스의 소재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다. 일무
오랜만에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찾아왔다. 9년간 꽉 막혀있던 관통이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 발표와 함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더니 미국, 중국의 힘겨루기 틈새에서 실리를 찾아 낸 것이다. 진정성과 진실한 접근이 통한 것이다. 그러나 한쪽서는 사촌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듯 미국과 중국 등 축하를 보내는 입장인데 야당은 연일 대화가 안 되기를 바라는 듯한 보도를 내고 있으니 대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북한의 붕괴와 한반도 통일지금 한반도는 휴전상태이다. 전쟁을 하다 피곤해서인지 양쪽이 모두 전쟁을 쉬기로 하여 합의한 것이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쿤타 킨데’는 미국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1976년에 쓴 소설 ‘뿌리’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는 서아프리카 감비아 지방의 원주민이었으나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미국에서 노예로 산다. 그러나 고국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온갖 멸시와 고초에도 불구, 자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쿤타 킨데는 남북전쟁이란 환난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땅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의 실상을 고발한 작가는 바로 쿤타 킨데의 7대손.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한국인들에게도 진한 감동을 주었다. 노예시장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중국인들의 속은 진짜 알 수 없다고 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옛 중국 서예가나 지식인들이 좋아하여 벽에 써 붙인 글귀를 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것은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사자성어다. 큰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어리석은 체 한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 노자의 명언으로 송나라 시인이었던 소식(蘇軾)도 시작에서 곧잘 이 글을 인용했다.또 중국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좋아한다. ‘난득호도 흘휴시복(难得糊涂 吃亏是福. 중국어 발음 난더후투 츠쿠이스푸) 즉 자신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추석연휴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청자 접시 하나가 한화 425억에 낙찰되는 뉴스가 화제가 됐다. 송나라 여요자기(汝窯瓷器)라는 이 청자는 푸른색이 돋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그릇이다. 그런데 작은 접시 하나가 4백여억이라니…. 이 천문학적 도자기 값이 어떻게 매겨진 것일까.중국 고완 자료에 송나라 자기는 중국 본토와 대만고궁박물관 등 유명한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10여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비싼 가격에 경매가 돼 왔었다.‘여요자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문화가 융성했던 송나라 시대 만들어진 그릇
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 이 드라마는 나라와 시대를 떠나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적폐청산을 내세우고 이전정부가 저질러온 각종 폐단과 사회 전반에 남아있는 구태를 청산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공직자의 애국 애민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관리가 치자(治者)의 입장에서 국민을 피치자(被治者)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봉사자로서 국민을 섬기는 대상으로 보는가, 그 관점에 따라 사정은 다르다. 그동안 관리나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 국민의 머슴임을 수없이 말했지만 구호로
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 드라마가 지난주에 26회까지 방영됐으니 중반부를 지나고 있다. 우성룡은 첫 부임지 나성현 지현으로 6년간 근무하면서 백성과 더불어 울고 웃었으며 모든 일에서 백성이 우선이었다. 관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만 멸사봉공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아니다. 고장의 평화와 주민 안정을 이뤄낸 나성 지현 우성룡의 선정이 널리 소문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승진을 거듭한 그는 사천 합주와 호광 황강 지주를 거쳐 무창지부에 올랐다.때마침 무창 일대는 오삼계가 주도하는 ‘삼번의 난’이 일어나 힘든 곳
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가훈 가운데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 말을 해석해 보면 ‘어리숙하게 보이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똑똑한 사람이 속내를 감추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쉽게 않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똑똑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 어찌 보면 참 현명한 처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외모만으로 경제적·사회적 지위 등을 판단하기 힘들 때가 많다. 만약 어떤 사람이 허름하게 보이는 옷을 입었을 경우, 그가 부자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이
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인사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도자가 꼭 필요하다는 뜻인 바, 무엇보다 중앙의 정치지도자들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단위 기관장을 막론하고 공적 책임을 맡고 있는 공직자들이 원칙과 소신을 지켜 국민을 편하고 복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관리들이 인격적인 측면과 업무 수행능력에서 각자 임무를 다 해내기란 예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다. 그래서 모범을 삼으려 옛 성현이나 청백리의 언행을 들춰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종 때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지난달 28일 북한이 ‘화성–14형’ 발사 직후 틸러슨 국무장관 등의 행정부 인사들에게 “북한 정권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해 미·중이 사전에 합의하면 북핵 문제 해결에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를 잃을까 불안해하는 중국을 달래기 위해 북한 붕괴 후의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임을 미리 약속하고 북핵을 제거하는 작업에 공조를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키신저의 말을 두고 말들이 많다. 한국에선 주로 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혼인 풍속을 들여다보면 연상 신부 고사가 많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은 남편인 가야국 수로왕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절세미인 미실궁주는 여러 남자와 결혼하고 애인을 삼았으며 나중에는 자식뻘 되는 연하의 남자와도 사랑을 나눴다.금(金)나라 시조 아골타의 선조 함보(函普)는 본래 신라사람이었다. 그는 성이 김씨로 국경에 살다가 여진 땅으로 귀화하여 60세 여추장과 결혼했다. 여 추장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이들이 후에 여진족을 중흥시켰다. 여진이 국호를 금(金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20년 12월 29일, 이완용은 3.1운동 진압의 공로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됐다. 당시 후작은 일본 안에서도 몇 명 안 될 정도로 권위가 높은 작위였다. 1922년에 이완용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1925년까지 4년간 서예부문 주임으로 활동했다. 이완용의 서예 실력은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조선 총독 데라우치로 부터 일본 천황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 1913년 10월 11일 이완용은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휘호를 써 보내라는 ‘천은’을 입는다. 이완용은 즉시 14자의 한시를 비단에 써
대한제국아리랑정미애(지원) 일만년 이상 유구한 우리역사일만년 이상 보유한 우리전통세계방방곡곡 우리 문화재 우리보물우리문화 넘실거리네우리문화 오늘날 K-POP으로 승화되어지구촌 전체가 열광하네환인과 18분의 환웅들과47분의 단군들께서 세우신 고조선제국광개토대왕께서 사라센제국과 전세계영토를통일해주신 고구려제국인도 허황후와 혼인하고 인도와 일본 영토에 가서 살던 가야제국과 백제제국이사부와 지증왕이 협력하고 삼성혈고량부독도 우산국과 탐모라제국이 모든 제국을 통일하고 이어온 천년의 신라제국왕검 태조대왕의 귀족호족문화 만드신 고려제국이성계 태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청루(靑樓)란 중국 창관(娼館)의 아취적 표현이다. 본래는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청루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기생을 두고 손님을 맞는 색주가의 대명사격이 됐다.규모가 큰 청루에는 수백명의 아리따운 창기들이 있었다. 이 창기들에게 서화와 시문을 가르쳐 지식계급인 사대부들과 대화가 통하게 했다. 중국 옛 화가들은 화려한 비단 옷에 비파를 든 청루 미인들의 모습을 앞 다퉈 그리기도 했다.명, 청대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 안의 청루는 어디에 있었을까.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 인근지역으로 황제를 배알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시대 화가들은 여자들의 모습을 즐겨 그리지 않았다.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유일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소녀티를 갓 벗은 여인은 트레머리에 동그란 얼굴로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을 가졌다.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수에 차있다.근세에 와서 여권이 신장되자 궁정화가였던 이당 김은호 화백이나 그 제자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 대가들이 미인도를 잘 그렸다. 보기 드문 절색의 여인을 그린 것이라서 미인도는 인기가 있었다. 한때는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를 다녀왔다. 후에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1802~1945)의 도읍지이다. 응우엔은 200년간 남북으로 나뉘었던 베트남을 통일했다. 베트남(越南)이라는 나라 이름도 이때 생겼다. 후에 왕궁을 답사했다. 정문인 오문(午門)에서 표를 사서 왕궁으로 들어갔다. 정전(正殿)인 태화전(太和殿)을 가려면 두 개의 패방(牌坊: 문짝이 없는 삼문)을 지나야 한다. 오문 앞에 패방이 하나 있고, 중도교(中道橋)를 건너면 패방이 또 있다. 소위 외삼문과 내삼문 격이다. 오문(午門)을 배경
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인들과 함께 중국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다. 일제 말기 우리나라에 거주한 화교가 6만명을 넘었고, 중국 음식점도 300개 정도 됐다. 당시 중국 음식점의 고객은 대개 중국인들이었다. 해방이 된 뒤 중국인들은 난감해졌다. 대륙이 공산화되어 돌아갈 수 없게 된데다 한국 정부가 화교들의 무역을 금지시키자 살길이 막막해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음식점을 열어 살길을 찾았고, 중국 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게 개발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이 때 나온 게 자장면이다. 자장면은 1950년대 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시대에도 의로운 일을 한 이들에게 ‘의사(義士)’라는 칭호가 붙여졌던 것인가. 5백년 전 인물이었던 ‘김태암 의사’의 고사가 흥미롭다. 김의사는 기묘사화 때 서울에서 충북 보은으로 내려와 처가살이를 하면서 모욕과 수난을 당한 예조 관리 구수복을 잘 보살펴 준 덕으로 기묘명현록에도 등재된 인물이다.구수복은 과거 급제파로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였다. 그런데 대사간 조광조가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비호하려다 파면됐다. 그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보은 장인의 농장으로 낙향, 처가살이를 하게 됐다. 그런데 노비들
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한국기업관리대학 학장 중국이 G2로 성장하는 데는 중국 국내뿐 아니라 중국 출신 국외 사업가들의 활약이 컸다. 전 세계적으로 화교(华侨)인 수만 해도 약 90개국, 5500만명에 이른다. 그야말로 거대한 경제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 국가에서 화교 출신 기업들이 거주국에서 차지하는 경제 비중은 평균 70%를 상회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기업의 약 80%가 중국 출신임을 감안할 때 그들의 경제적 파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이렇듯 중국인은 유태인과 더불어 세계에서 돈을 잘 버는 민족으로 알려져
이재준 역사연구가친명사대(親明事大)를 국시로 삼은 조선은 사병을 혁파하고 국방을 명나라에 의존하는 잘못을 범했다. 정변을 우려한 나머지 군사조직의 해체한 것이었으나 조선은 약체국가로 전락하여 5백년 동안 미증유의 전란을 여러 차례 겪어야 했다.별기군 30만을 자랑했던 군사력은 일시에 내란 정도나 막을 수 있는 나라로 전락했다. 선각자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조정을 경각시키려 했던 노력은 동·서 양인들의 파쟁적 이전투구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웃이 점점 강성해지는 것을 잊고 자리다툼으로 세월을 보냈다. 외적보다는 내부의 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