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가 독자참여코너로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연재합니다. 낱말 퀴즈는 가로세로 낱말퍼즐 저자로 잘 알려진 김수웅 선생이 직접 출제한 퀴즈가 격주로 게재됩니다. 퀴즈에 응모하는 독자 중 5분을 추첨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가로열쇠1.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의 나이에 주먹계를 평정한 종로의 ‘오야봉’이 된 협객3.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 장수5.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의 아들. 낙랑공주와 ▢▢왕자의 사랑7. 빛깔이 흰 강아지(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03년 4월,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일본에선 개전론(開戰論)이 대두됐다. 하지만 협상론이 우세했다. 8월 12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협상안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세한 이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만주의 철도경영에 관한 러시아의 특수 이익을 승인한다’는 소위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었다.10월 3일에 러시아는 일본에 회답했다.“만주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가 한반도의 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00년 6월에 의화단 사건은 만주에도 파급됐다. 7월에 의화단은 요양 지방에서 철도를 파괴하고 러시아 철도 수비대를 공격했다. 건설 중인 러시아의 동청철도는 위협을 받았다. (동청철도는 만주리-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의 일부로서, 남만주 지선은 하얼빈에서 뤼순·다롄으로 연결된다. 러시아는 1898년에 뤼순·다롄을 조차(租借)한 다음 하얼빈역에서 뤼순에 이르는 남만주 지선 부설권까지 차지했다.) 이에 러시아는 동청철도 보호를 구실로 16만명을 출병시켜 만주 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약용(丁若鏞)이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는 계기가 된 을묘박해(乙卯迫害)의 전모(全貌)를 소개한다. 1794(정조 18)년 청나라 출신의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의주 관문을 통과한 이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걷기를 12일 동안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 이듬해 정월 초에 서울에 도착했다.이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천주교회(天主敎會) 교세(敎勢)는 전국적으로 신자수가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위치한 최인길(崔仁吉)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싸움인 ‘0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을 대리해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한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1902년 1월에 영일동맹을 체결한 영국은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왔다.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의 진해만과 마산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결정했고, 6일에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메이지 천황은 육·해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6일 아침에 나가사키 근처의 사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기 사흘 전 서울 봉은사에 현판 하나를 써줬다. 바로 그 유명한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다. 왜 추사는 비로자나불상을 안치한 법당을 판전이라고 한 것일까.법당은 나무로 짓는 것이 상례다. ‘넓은 나무집’이라는 뜻인데 굳이 어린아이 글씨 같은 필체로 이 두 글자를 세상에 선문답하듯이 남기고 간 것일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화두로 내놓은 것은 아닐까.판교(板橋)는 우리말로 ‘널다리’란 뜻이다. ‘가는 다리’인 세교(細橋)와 반대되는 표현이다. 넓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776년(영조 52)년 3월 10일 영조(英祖)에 이어서 제22대 임금으로 정조(正祖)가 즉위(卽位)했다.이와 관련해 그 해에 미국이 독립했으며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國富論)’을 저술했으며 청나라는 42년째 건륭제(乾隆帝)가 재위(在位)하고 있었다.이러한 시기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개혁군주(改革君主)로서의 면모(面貌)를 보여줬는데, 즉위한 이후 정조는 다음과 같은 유시(諭示)를 내렸다.“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764(영조 40)년 영조(英祖)는 동궁(東宮)을 이미 세상을 떠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입적(入籍)시켜 그의 대(代)를 잇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와 관련해 동궁이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됐으나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가 결국 당쟁의 희생양이 됐듯이 항상 생명의 위협을 안고 살았다.이러한 상황에서 동궁은 특히 인척(姻戚)이 되는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圖書室)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죽음과 공포의 도시가 된 카블. 전쟁으로 패망한 나라가 겪는 참담한 비극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겉으로는 통합을 외치면서 도심을 장악한 탈레반 군사들의 만행에 세계가 전율하고 있다.비겁한 대통령은 국외로 탈출했다. 미국 등 우방국에 동조한 시민들의 액소더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 편의 영화처럼 카블을 탈출하고 있는 사연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탈레반이 복장 규제 과정에서 몽둥이질을 퍼붓는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인권단체인 국제 앰네스티는 최근 조사를 통해 탈레반이 지난달 초 가즈니주에서 하자라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1년도 안 돼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틀어져버린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협상이 개시되면서 새 장을 열었다.29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별도 자치국가인 홍콩을 영국에게서 이양 받아 자국에 귀속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격상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등 강국으로 성장했다.중국의 이 같은 성장 뒤에는 덩샤오핑 주석이 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 벤치마킹,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화교의 자본, 외국 기업과의 합작을 통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고종 황제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기치(旗幟)로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매관매직은 여전히 풍습이었다.1898년 1월 11일에 일본 도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관은 본국에 보고했다(한국엔 공관이 없었다).“한국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관료들은 정부로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흡혈귀처럼 민중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한국은 거의 희망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라는 한문소설은 한 총각과 시집가지 못한 채 죽은 처녀의 한을 그린 작품이다. ‘저포’란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다.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한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이 지었다.만복사는 지금의 남원시에 있던 절이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 남은 여러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매우 번창했던 것 같다. 신라 다섯 소경(小京)의 하나인 남원소경 시기 경찰(京刹)이 아니었나 싶다.주인공 양생은 남원 양반가의 총각으로 만복사에서 공부할 때 비
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지난 3월 18일 양일간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회담의 파장이 연일 중국 전역을 온라인에서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열기가 꺼질 기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영 CCTV는 회담과 관련된 특집보도도 내보고 있다. 미국과 서구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1901년 신축년에 의화단의 난으로 청나라와 미국 등 서구 열강과 맺은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과 60갑자 두 번 지난 금번 미국과 회담을 비교하는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당시의 신축년(辛丑年)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중화인민공화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족(漢族)의 나라인데 한족은 17세기 중엽 한족의 나라인 명(明)이 멸망하고 중국을 차지한 만주족 청(淸)의 지배를 2백년 넘게 받다가 청나라가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로 무너지면서 중국의 주인 자리를 회복했다. 이후 내전과 일본의 침략으로 상당기간 혼란을 겪었는데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내전의 최후의 승자가 돼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할 점이 있다. 한족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개최에 경악한 고종은 즉시 견제에 나섰다. 3월 15일에 고종은 특명을 내려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이원긍, 여규형, 안기중 4명을 구속시켰다.지석영(1855~1935)은 우리나라에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을 처음 보급한 사람이다. 그는 1883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해 우두를 보급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를 했다.지석영은 1894년 7월 5일에 민씨 척족 실세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았던 조선의 임금은 잠실 나루 근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전쟁에 패배해 수많은 조선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 그 중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20세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일본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징용 배상 문제와 함께 현재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당시 조선사회가 환향녀 문제를 다룬 방식과 현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을까? 조선 여인들이 끌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의친왕(義親王)의 6개국 순방과 관련하여 ‘마지막 황실의 추억’ 제하의 책 194쪽을 인용한다.“‘고종실록’의 이 기사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이 생긴다. 어머니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5일 만에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라고 고종황제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는 ‘답례 방문’이라고 했는데 무엇에 대한 답례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아버지의 유럽 순방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1896(건양 1)년 의친왕은 일본으로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1년 1월 13일 정오 이범진 대한제국 주러시아 공사가 60세 나이에 망국의 한을 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1899년 러시아에 부임한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11월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뺏기고 러시아 내 대한제국 공관이 폐쇄됐음에도 임지를 떠나지 않고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일본의 강압적 조치에 항의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어 그는 고종 황제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이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틀 후인 1895년 8월 22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민왕후를 폐서인했다.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다스림과 덕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왕후 민씨가 그 친당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어 백성을 수탈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먹고 탐학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이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시해한 것이다.그런데 이 사건은 배후와 시해 과정·시해범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 데다가 일본이 사건을 철저히 인멸·왜곡했기 때문이다.먼저 을미사변 전야부터 살펴보자. 1895년 2월 일본군이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까지 위협하자 청나라 조정은 급히 이홍장을 시모노세키로 파견했다. 이홍장은 요리 집 춘범루에서 이토 총리와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