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새 단원 풍속화에 담긴 ‘인의(仁義)’
[이재준 문화칼럼] 새 단원 풍속화에 담긴 ‘인의(仁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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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18세기 후반 조선에는 사진기가 없었다. 삶의 모습을 담아낼 수단이 전무했다. 화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속화(俗畫), 즉 풍속화였다. 18세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된 한 청년은 인물을 잘 그렸다. 스승들의 놀이에도 나가 풍류를 그렸다. 

젊은 화가는 한양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정교한 필치로 시대의 생활상을 담아냈다. 임금의 영정을 그리는 화원이었지만 귀족의 삶보다는 서민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민초의 삶에 묻어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인의(仁義)를 담아낸 것이다.
화가는 조선 후기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였다. 그가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조선 서민사회와 모습과 정서를 리얼하게 그린 때문이다. 

단원은 그가 평생 사용한 아호다. 김홍도가 단원이란 아호를 가진 것은 명나라 화가 단원 이유방(檀園 李流芳)의 삶을 흠모하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 화가의 그림을 어디서 얻어 공부한 것일까. 

답은 단원의 외가에서 찾아진다. 외가는 대대로 역관을 지낸 부유한 장씨 집안이다. 단원의 어머니는 어린 단원이 그림 솜씨가 있자 청나라에 자주 가는 외삼촌에게 부탁해 서책이나 화첩을 구하지 않았을까.

단원은 안산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외삼촌은 안산 처가에서 내려와 살고 있는 한 사대부를 찾아가 어린 단원의 교육을 부탁한다. 스승은 시서화(詩書畵)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린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이었다.  

표암은 김홍도를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직감했다. 코흘리개 소년은 표암을 스승으로 삼아 집을 드나든다. 김홍도의 나이 18세가 되자 표암은 제자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해 서울로 보냈다.  

김홍도는 23세 나이에 풍속화를 그렸다. 지난주 언론에 공개된 단원의 새 풍속화 7점이 태어난 배경이다. 이 풍속화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단원의 25점 풍속화에 없는 것들이다. 다만 조선 후기 성협(成俠)이라는 화가가 그린 풍속화의 원래 모델인 것으로 확인됐다. 성협이 단원의 그림을 보고 이를 모사한 것이었다. 

새로 찾아진 풍속화에는 소년 단원과 도화서 화원으로의 삶이 그려져 있다. 마상에 앉은 사대부에게 담뱃대를 붙여주는 어린 소년,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 두 명의 소년들은 어린 단원이다. 거문고를 타는 스승 옆에 앉은 미남 청년, 도화서 화원들의 출행과 야유회에서 화로에 고기를 구어 먹는 그림 속에도 단원이 등장한다. 인물들의 얼굴에는 화기와 자애로움이 넘치고 있다. 

이 풍속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일 끝장에 있다. 어둔 밤 갓을 쓴 한 명의 남자와 전모 차림의 두 여인이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는 그림이다. 남자는 방한 가리개로 얼굴을 감싼 20대 청년이며 두 여인은 전모를 쓰고 있는 기녀상이다. 여인은 약간 네모진 얼굴의 20대 미인상인데 손에는 책보자기를 들고 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 쓰인 묵기(墨記)는 바로 1786년 4월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을 알려준다. 학자들은 단원의 풍속화가 막연히 30대에 그려졌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번 발견 된 묵기로 23세 나이에 풍속화가 그려졌음이 확인된 것이다. 

김홍도와 스승 강세황은 남다른 사제의 정을 보여줬다.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화폭에 담으러 갔을 때 단원은 스승을 모시고 갔다. 겸손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행하며 올곧은 삶을 살았다. 스승 표암은 한 글에서 제자의 그림이 신기(神技)에 가깝다고 칭찬했다. 표암과 단원이 실천한 사제의 정은 뜨거운 교훈으로 회자된다. 천재 화가가 남긴 250년 전 조선의 풍속화를 통해 오늘날 퇴색해가는 ‘인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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