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3월 29일에 뉴욕타임스(NYT)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유관순’이라는 제목으로 유관순(1902∼1920) 열사 부고 기사를 냈다.  

유관순의 부고 기사는 ‘간과된(Overlooked) 여성들’이란 제목 아래 인류역사에 공헌한 여성 15명에 대한 소개의 일환이다. NYT는 1851년 창사 이래 부고기사는 주로 백인 남성이었음을 반성하면서, ‘제인 에어’를 쓴 영국의 소설가 샬롯 브론테(1816~1855)를 필두로 중국 청나라 여성혁명가 추진(1875∼1907) 등의 부고를 실었다. 

이렇듯 여성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면 주목받아야 할 조선의 여성은 없는가? 필자는 10명의 여성에 주목한다. 신사임당 논개 계월향 황진이 매창 송덕봉 허난설헌 이옥봉 김만덕 김삼의당이다.  

신사임당(1504∼1551)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고 5만원권 지폐인물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만 최근엔 현모양처 논란이 있다. 

논개와 계월향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여성이다. 논개는 진주성에서 계월향은 평양성에서 의절했다. 논개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진주의 관기(官妓)로 알려졌다가 1750년에야 의병장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밝혀졌다. 진주성 입구에는 ‘논개’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로 시작하는 시이다.  

계월향은 김응서 장군을 도와 왜장의 목을 벤 평양 기생인데 평양에는 월향동과 의렬사가 있고, 만해 한용운의 ‘계월향에게’란 시도 있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명기(名妓)로는 북에는 황진이, 남에는 매창이다. 송도기생 황진이는 서경덕에 대한 흠모 등 일화가 너무 많다. 부안기생 매창(1573∼1610)은 유희경의 연인이고 허균과도 교류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절창(絶唱)이다.  

한편 사대부 집안의 여류문인은 송덕봉과 허난설헌이 있다. 송덕봉(1521∼1578)은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의 부인으로 양성평등에 앞장섰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허난설헌(1563~1589)은 허균의 누나로서 여자로 태어난 한을 승화시킨 시인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데 실패했고, 남매를 잃은 뒤에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허난설헌의 문집은 일본과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이옥봉은 선조 때 여류시인으로 소실(小室)이었다. 그녀는 이웃의 누명을 벗겨준 시를 형조에 냈다. 그런데 남편은 아녀자가 관청의 일에 관여했다하여 친정으로 내쫓았고, 그녀는 영영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김만덕(1739~1812)은 제주의 관기(官妓)로 제주 특산물을 서울 등지에 팔아 큰 부자가 됐는데 1790년부터 1794년까지 제주에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물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했다.  

김삼의당(1769~1823)은 남원의 몰락한 향반 출신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한마을에서 자란 동갑내기와 혼인했는데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를 주고받았다.   

언론사가 앞장서서 조선의 여성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하였으면 한다. 이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린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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