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성 여행길에 공자를 찾아갔다. 명대에 지은 공부대문은 곡부시내 중심에서 남향으로 서있다. 5개의 대들보를 3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용마루는 회색기와로 지붕은 짐승모양의 기와로 덮었다. 건물의 모습은 비교적 평탄하고 단순하며, 사용된 자재도 심플하다. 전체적인 구조나 외관에서도 명대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간마다 하나의 문이 있으며,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무늬를 칠했다. 대문 정중앙에는 남색바탕에 황금빛 글씨로 쓴 ‘성부(聖府)’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의 기둥에도 역시 남색 바탕에 황금빛 글씨로 ‘여국함휴안부존영공부제(與國咸休安富尊榮公府第), 동천개로문장도덕성인가(同天開老文章道德聖人家)’라는 대련이 걸려있다. 청나라 사람 기균(紀昀)의 글씨이다. 글씨와 문장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거니와, ‘문장’과 ‘도덕’의 뒤에 관청이 아니라 성인의 집이라는 말을 넣었다. 말발도 크지만, 자세히 보면 ‘부(富)’의 점은 작고, ‘장(章)’의 점은 길게 그었다.

공부를 ‘천하제일가’로 자부한 것은 어떤 귀족도 받지 못한 특권을 누렸다는 의미이다. 공부에는 9개의 정원이 있다. ‘9’는 최고 등급을 의미한다. 황제의 특별한 은사가 없이는 어떤 귀족도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어기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므로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공부는 공당(公堂)뿐만 아니라, 의문(儀門)도 세울 수도 있었다. 다른 가문은 생각도 하지 못할 특권이다. 부귀도 그만큼 보장이 됐다. 부에 작은 점을 찍은 것은 영원히 부를 보장받는다는 의미이다. 장에 점을 유달리 길게 쓴 것은 문장이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공자의 학설이 천지가 가득하고 일월처럼 빛난다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동서 양쪽의 곁방은 각각 5간이다. 서쪽의 곁방은 재주청(齎奏廳) 또는 외서방(外書房)이다. 6품 재주관이 이곳에서 서울과의 사무를 전담한다. 지현인 7품 이하의 관리들은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동쪽 곁방은 문방(門房) 또는 동방(東房)으로 공부의 행정처리와 공문서수발을 담당하는 곳이다. 각종 형구를 설치하고 집안사람들을 다스리기도 했다. 자료에 따르면 청의 도광7년(1827)에 244명을 처벌했다고 한다. 

존귀한 공부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어서, 누구도 공씨가족을 노예로 부리지 못했다. 그러나 규정은 규정이고 사실은 사실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서 살고 있는 수많은 공씨들이 모두 빈부의 구분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대개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는 공씨는 개명을 하거나 성을 바꾸어야 고용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용인들도 공부에서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여성고용인이 아이를 낳을 때는 절대 공부에서 낳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부대문의 남쪽에는 수십간의 초방이 있는데 이곳에서 여성고용인들이 아이를 낳았다. 그 때문에 이곳을 ‘희방(喜房)’이라 부른다. 여성고용인은 희방에서 아이를 낳고 나면 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희방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출입을 해야 한다. 이 작은 문은 귀신이 다니는 길이라 부른다. 곡부의 북문은 공림으로 통하는 대로와 연결돼 있으므로 ‘신도(神道)’라고 한다. 공씨가족이 죽으면, 누구든 공림에 묻힌다. 제왕의 후손도 누리지 못하는 이러한 특권을 누리는 공씨가 부럽기도 하지만, 공자 자신이 과연 그것을 원했을까? 존경을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된 공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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