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금정촬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는 계기가 됐던 을묘박해(乙卯迫害)의 전모(全貌)를 소개한다.

1794년(정조 18) 청나라 출신의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어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관문을 통과한 이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걷기를 12일 동안 반복하다가 그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정월초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천주교회 교세는 전국적으로 신자수가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처소를 정한 이후 몇 개월 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성토요일에는 신자들에게 영세(領洗)를 주는 한편 고해성사(告解聖事)는 언어가 소통이 안되는 관계로 필담(筆談)으로 했다.

동년(同年) 4월 5일 부활대축일(復活大祝日)에 주문모 신부의 집전으로 조선에서 최초로 미사성제가 거행됐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해 사목활동을 수행한지 6개월이 돼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어느 신자의 밀고로 인해 그동안 극비 정보였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과 그 처소가 조정(朝廷)에 알려지게 되고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을묘박해가 시작됐다.

주문모 신부는 조정의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신자들의 불굴의 희생정신으로 결국 체포되지 않고 여성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강완숙(姜完淑)의 처소에 은신하는데 성공했다.

주문모 신부가 당국에 체포되지 않고 강완숙의 처소에 은신하는 과정에서 주문모 신부의 처소를 제공하였던 최인길과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이 체포된 이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으며, 결국 장살(杖殺)의 처분을 받고 장렬히 순교(殉敎)했다.

조정(朝廷)은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데 대해 책임을 물어 이승훈(李承薰)은 예산으로 유배가게 됐으며,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은 각각 충주목사와 금정촬방으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을묘박해의 전모를 소개했는데 대규모 박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남인계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유배를 가거나 좌천되면서 정국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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