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순휘(호국문화문학협회 사무총장)
최근 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에서 보이는 중국의 대응전략에서 과거의 중국외교와 다른 변화를 발견해야 한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뚱(毛澤東)이 사망한 이후 실질적인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생전에 강조했던 중국의 외교노선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의미하는 바는 ‘칼집에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중국은 소련처럼 미국과의 불필요한 군비경쟁을 회피해 내실있는 외교전략을 추진했고, 그것이 1990년대 쟝쩌민(江澤民)의 ‘화평굴기(和平崛起)’라는 것이다. ‘굴기(崛起)’는 ‘산이 우뚝 솟은 모양’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 중국의 패권적인 이미지를 숨기고 평화시대를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외교개념으로, 굴기외교는 후진타오(胡錦濤)가 2004년 1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을 순방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외교노선으로 지속화되었다. 이번 일본과의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을 대응하는 중국의 전반적인 대응에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외교전략이라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면에서 이제 중국은 ‘화평굴기(和平崛起)’를 넘어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고 주변국들은 경계와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유사(有史)이래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면 반드시 군사력으로 아시아의 주변국들을 침략하여 복속(服屬)시키거나 조공(朝貢)관계를 맺어서 패권(覇權)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사실(facts)이다. 그러던 중국이 1839년~1842년 사이에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과 1856년~1860년 사이에 제2차 아편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던 청조말의 국가위신은 참담한 지경이었다.

반면에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개방과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은 군대를 신식무기로 무장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상황이었다. 그 후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대륙침략전쟁망상을 기획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전불사(一戰不辭)의 전쟁준비를 해왔다.

1894년 7월 29일 경기도 성환일대와 평양, 만주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나라는 일본의 신식군대에 패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린우호관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역사상 최초로 자국의 군대를 가지고 중국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조선을 식민지로 불법점령했으니 국가적 분위기는 열광적인 흥분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 대하여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점령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제는 만주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9.18사변), 즉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 만주철도폭파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지역을 불법 점령해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황제(皇帝)로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그리고 일본은 ‘루거우 다리(盧溝橋)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는데 이 사건은 뒷날 일본군이 조작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중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할 때까지 무려 8년여 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오늘날 중국은 더 이상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은 과거 역사의 오욕(汚辱)을 씻고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여 왔던 것이다. 청조말부터 무너진 대국 중국의 자존심을 찾고자 중국의 지도자들과 중국인들의 단결된 노력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지난 9월 11일 댜오위다오(센키쿠)국유화매입에 대응하는 중국지도부의 단호하면서도 자신감있는 일사분란한 조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차기 권력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지난 9월 19일,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은 81년 전에 9.18사변(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주었음에도 이를 반성하지 않고 또 ‘(센카쿠열도)구매’라는 코메디(웃기는 짓)를 연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 부주석은 미국을 향해서도 ‘근언신행(謹言愼行)’이란 말로 경고했다.

그는 “미국이 지역평화와 안정이라는 원칙에 따라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해(진앤션싱, 謹言愼行), 댜오위다오 주권 분쟁에 개입하지 말고, 모순을 격화시키거나 상황을 복잡하게 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달라진 중국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중국의 국력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견제와 조화의 대상이지 억제와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비록 미국이 미일상호방위조약상의 공동방위를 전제하고 있지만 결코 일본의 입장에서만 이 문제를 조율하기에는 중국의 의지가 단호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노다총리는 선거를 앞두고 중국과의 센카쿠열도분쟁과 한국과의 독도분쟁을 쟁점화하면서 소위 국수주의(國粹主義)에 편승한 득표전략의 일환으로 사건을 노골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외교전 수준의 항의와는 달리 강력한 중국의 반발에 일본은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8일에는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 100여 개 도시에서 수십만의 중국인은 일본의 센카쿠 국유화 조치를 규탄하는 데모를 했다. 이와 같은 중국민들의 강력한 반일 수준을 넘어서는 항일데모도 역시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 국민적인 단결력을 보이는 새로운 사회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반일 시위에 중국정부가 배후라는 일본의 폄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중국의 언론도 영토 문제에서 일본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중국 정부의 확고한 입장을 보여주면서 당초 중국 영토였던 이 섬의 소유권 변천과 관련한 역사를 심도 있게 분석한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사회주의 언론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국사회가 국익에 얼마나 민감한가를 보여주는 통제의 단면으로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이 이처럼 지도층과 일반국민층이 하나가 되어 투쟁한 역사가 없었던 역사적인 고찰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번 일은 중국의 ‘하나됨(oneness)’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공산당의 깃발아래 전쟁도 할 수 있는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으로 국민적 통합과 군사력 건설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은 손자병법에 말 한대로 “부전이 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 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즉, ‘싸우지 아니하고 적을 이기는 군대가 가장 강한 군대다.’라는 최상의 무력강국에 도달하였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도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경계를 강화하면서 미래안보위협에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미래의 주적은 북한을 넘어서 중국이라는 과거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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