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고려 예종 10년(1115년)의 기록에 의하면, 생여진(生女眞)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금나라를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평주(平州)에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에 거주했으며 이가 금의 시조라 하였고, 또는 평주 승 김행의 아들 극기가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고을(古乙)이고 태사가 되었다. 고을이 낳은 아들 활라(活羅)도 태사를 이었다. 활라는 많은 아들을 두어 장자가 핵발리고 계자(季子)를 영가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이어서 중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장자 오야속이 위를 이었고 그가 죽자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했다.

또 금나라를 세우기 전 고려 예종 4년(1109년)에 여진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은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며 지금 태사 오야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라고 했다. 신민단사에는 신라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태사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 시조의 성(性)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물론 위 기록들은 고려의 입장에서 쓴 기록들이므로 아골타의 조상이 고려와 신라 사이에 다소 혼란은 있으나 그것은 지금 별 문제가 아니다. 금나라 조상들이 옛 우리 고조선 한반도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중국이나 우리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 보면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무례한 국서이나 당시 중국을 굴복시킨 금나라의 위세로 보아 이해는 간다. 위의 글을 고려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해도 금 태조 아골타는 자신 가문의 기원이 한반도에 있음을 굳이 밝히고 있었다. 그는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도 했다.

이렇듯 고려사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기록이 많다. 조선의 ‘지봉유설’에도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금은 고려를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주는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 송나라 사서 ‘송막기문(1156년 송나라 홍호가 쓴 견문록)’에도 금의 시조 아골타의 조상은 신라에서 왔다고 했다. 이런 기록만 보아도 신라의 망인이 여진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좀 더 사실화 되고 있다. 후금을 세워 청(淸)나라 태조가 된 누르하치는 누구인가. 중원을 정복한 그는 왕실의 성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칭하고 그 역시도 자신들의 조상을 신라인이라고 했다. 누르하치는 아골타의 16대 후손이다.

중국의 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였다. 그 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中華), 스스로 문명국이라 자랑한 것에 불과했다. 거란(요), 여(금), 원, 청은 중국사가 분명 아니다. 이들 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고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周恩來)가 북한 방문 때 양심고백을 했었다. 청나라 뿌리는 후금이요 여진이었다. 그들 조상은 신라의 마의태자가 아니면 그의 형제들이나 왕족들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역사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