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청루(靑樓)란 중국 창관(娼館)의 아취적 표현이다. 본래는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청루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기생을 두고 손님을 맞는 색주가의 대명사격이 됐다.

규모가 큰 청루에는 수백명의 아리따운 창기들이 있었다. 이 창기들에게 서화와 시문을 가르쳐 지식계급인 사대부들과 대화가 통하게 했다. 중국 옛 화가들은 화려한 비단 옷에 비파를 든 청루 미인들의 모습을 앞 다퉈 그리기도 했다.

명, 청대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 안의 청루는 어디에 있었을까.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 인근지역으로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신들이 묵는 객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사신일행은 저녁이면 청루에 나가 술을 마시고 여인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 청루에서 의협심이 강했던 조선의 역관이 임진전쟁 당시 명나라 원군을 얻는 보은의 역사를 만들었다. 선조 때 ‘보은단동(報恩緞洞)’이란 고사는 역관 홍순언에게 은혜를 입은 한 청루여인의 얘기를 담은 것이다.

사신을 따라 연경에 온 홍역관은 청루를 찾았다가 품위 있는 젊은 여인을 소개 받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소복을 하고 울고 있었다. 홍역관이 사정을 물으니 여인은 절강성 출신의 사대부집 딸로 부친이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비를 마련키 위해 청루로 팔려 왔다고 말했다. 홍역관은 이 말을 듣고 지니고 있던 은자 수천냥을 주고 여인을 구해주었으며 부친의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후에 명나라 병부시랑 석성(石星)의 아내가 됐다. 그녀는 홍역관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남편을 설득, 조선원군 파병을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뒤에 홍역관이 연경을 찾았을 때 비단에 ‘보은(報恩)’이란 글씨를 수놓아 징표로 주었다. 그가 지금의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인근에 살았으므로 이곳을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파견함으로써 운명이 기울어졌다. 후에 석성은 조선 파병에 대한 비판을 받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부인은 자녀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귀화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살았다고 한다. ‘친구(朋友)를 제일 중시하고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다’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습성을 대변한 고사로 회자된다.

연암(燕巖)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재미난 기록이 전한다. 연암은 사신일행으로 청나라 건륭황제의 여름 휴양지 열하(중국 허베이 성)를 갔다 돌아오게 된다. 처음 도착했을 때 황실에서는 대접이 융숭했다. 고위 관리와 시종들이 나와 화려한 환영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 황제의 어명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 사신들이 준수하지 않자 그 다음 날 부터 대우가 싹 바뀌었다. 격식 있는 대접은 사라지고 귀국 안전마저 보장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연암은 일기에 청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한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뜨겁고 차가움이 다르고, 눈 깜짝할 사이의 세태가 변하며 차가워졌다(…炎凉之異 轉眄之頃 時移事冷…’)

한반도 사드 배치 결정으로 중국과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그동안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한국에 대해 무척 실망한 태도다. 중국은 사드 배치장소를 제공한 롯데의 중국내 프로젝트에 대한 보복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한국 연예인의 방송 출연 금지, 여행객의 방한 제한, 중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화장품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중국이 초청한 성악가 조수미, 백건우 공연까지도 취소했다. 한중 문화교류를 위한 각종 연례행사도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있다.

홍역관이 살던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일대는 물론 요우커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명동도 썰렁한 분위기다. 열하일기의 기록처럼 시류에 따라 태도가 급변하는 중국인들의 습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한-중 사이가 과거 냉전 상태로 회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보은단동’ 고사는 명나라 사람들이 나라의 운명까지 걸고 조선을 의리로 대접한 역사다. 중국은 큰 나라다운 아량을, 그리고 우리는 보다 다각적인 외교로 설득, 사드문제를 풀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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