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쿤타 킨데’는 미국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1976년에 쓴 소설 ‘뿌리’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는 서아프리카 감비아 지방의 원주민이었으나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미국에서 노예로 산다. 그러나 고국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온갖 멸시와 고초에도 불구, 자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쿤타 킨데는 남북전쟁이란 환난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땅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의 실상을 고발한 작가는 바로 쿤타 킨데의 7대손.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한국인들에게도 진한 감동을 주었다. 

노예시장에서 팔린 흑인들은 서구는 물론 동양에도 공급됐다. 16세기에는 중국인들에 의해 한반도전쟁에 참여한 흑인들도 있다. 지난 70년대 한남대학에서 찾아진 ‘평양성 탈환도’에서 필자는 매우 흥미로운 묘사를 발견한 적이 있다. 

마차에 실려 포승줄에 묶인 검은 피부의 흑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해귀(海鬼)’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흑인들은 용맹스러워 싸움도 잘했으며 바다 속에 잠수시켜 적국의 배 밑을 뚫어 침몰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선조는 이 흑인병사를 친견한다. 선조 31년 임금이 명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장수 팽신고(彭信古)는 해귀를 데리고 나왔다. ‘저 신병은 파랑국(波浪國, 지금의 포르투갈) 사람이며, 이 나라는 바다 셋을 건너야 있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리 정도 된다’고 했다. 선조가 해귀를 본 후 소감을 말했다. 

“소방(조선국)은 치우치게 해외(海外)에 있으니 어떻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보게 됐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더욱 감격스럽소이다. 이제 흉적을 섬멸하는 것은 날을 꼽아 기대할 수 있겠소이다.”

임진전쟁 당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 시실리 섬으로 팔려간 비운의 소년은 장성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그림으로 부활했다. 이 그림은 19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비싼 가격에 팔려 한국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일본군이 총포거래상인 네덜란드 상인에게 대가로 노예를 주게 됐는데, 이태리 최고 권력자인 메디치 가문에 팔린 것이다. 조선인의 이름은 안토니오 코레아로 불렸다. 그 후손들이 지금은 이탈리아 시실리 섬뿐 아니라 뉴욕 등지도 많이 퍼져 있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숫자는 수십만명이나 됐다. 그런데 이들은 만주에서부터 중국 전역으로 강제 이주돼 살았던 모양이다. 베이징 동북에 있는 허베이성 평천현(平泉縣) 칠구촌(七溝村) 등 부락에는 한국 성씨를 가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 마을에는 박씨 성이 무려 50여 가구나 된다. 이들은 청나라 팔기병(八旗兵)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4백년간 낯선 이국땅에서 포로로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조선인의 이름을 지키고 살았으니 ‘뿌리’를 능가하는 생생한 노예 역사다.

지금도 간혹 신문지상에서는 현대판 노예기사를 읽을 수 있다. 소년 시절 외딴섬에 끌려가 십수년 중노동을 하다 탈주한 사례를 보면 말문이 막힌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예로 전락해 자유롭지 못한 삶과 고통에 시달리는지 알 수 없다.  

리비아 수도 외곽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판 노예 경매시장을 CNN이 보도했다. 이 노예시장에서는 6~7분 사이에 10여명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돈을 받고 유럽으로 보내던 중개상들이 유럽 입국이 어려워지자 일꾼으로 팔아넘기고 있는 것이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극악무도한 인권침해’라며 규탄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지만, 이미 돈으로 거래된 난민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죄 없는 민초들이다. 그래서 평화가 더욱 절실하다. 한반도에서 요원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의 ‘전쟁종식 평화운동’의 당위성이 더욱 부각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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