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시대에도 의로운 일을 한 이들에게 ‘의사(義士)’라는 칭호가 붙여졌던 것인가. 5백년 전 인물이었던 ‘김태암 의사’의 고사가 흥미롭다. 김의사는 기묘사화 때 서울에서 충북 보은으로 내려와 처가살이를 하면서 모욕과 수난을 당한 예조 관리 구수복을 잘 보살펴 준 덕으로 기묘명현록에도 등재된 인물이다.

구수복은 과거 급제파로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였다. 그런데 대사간 조광조가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비호하려다 파면됐다. 그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보은 장인의 농장으로 낙향, 처가살이를 하게 됐다. 그런데 노비들의 모함을 받고 추운 겨울날 처가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구수복이 눈보라를 헤맬 때 마침 지나가던 김의사의 눈에 띈다. 김의사는 내력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대접하며 농토를 주어 살도록 했다. 후에 구수복이 억울함이 풀려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되고 김의사의 행적은 선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김의사는 당시 마로에 내려와 있던 김정(金淨)과도 절친이었다니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젊은 지식인들의 불행을 감싸준 후원자였던 셈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보은 종곡에 은거했던 성운(成運)이 묘갈명을 쓰며 입에 침이 닳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인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자는 ‘인간의 인간됨은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논어는 ‘’군자는 어떤 것이 의(義)인지를 잘 알고, 소인은 어떤 것이 이익인지를 잘 안다. 따라서 군자는 어찌하면 훌륭한 덕(德)을 갖출까를 생각하고, 소인은 어찌하면 편히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고 했다.

맹자도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라고 정의했다. 인이 의에 앞선 덕목으로 따라다니는 것은 바로 인자한 심성이 전제 된다는 것이며, 행동하는 인을 의(義)라고 해석한 것이다.

조선은 5백년 의국(義國)으로 빛이 난다. 지식인들은 의리와 희생정신이 강했던 반면에 불의에는 서릿발 같은 강인함을 보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으로 의를 지킨 선비들이 기라성 같다. 퇴계 이황도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고 ‘의 실천’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임진전쟁 중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의병들의 거사는 위기의 조선을 구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청나라 지배 하에서도 송시열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택하여 괴산군 화양동에 명나라 황제 의종, 신종의 위패를 봉안한 만동묘(萬東廟)를 구축, 사대부 정신의 표상으로 삼으려 했다. 이런 ‘의’ 정신은 한말 척왜운동과 민족자존의 3.1정신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애국운동으로 결속됐다.

15년 전 일본에 유학중이던 고 이수현 청년의 살신성인은 한민족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연면한 의정신의 결과였다. 일왕이 고인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며 많은 일본인들은 지금도 그의 살신성인을 잊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화재가 난 원룸에서 주민들을 깨우려다 연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은 고 안치범(28)의인의 영전에 한국이 숙연해졌다. 안씨는 제일 먼저 건물을 빠져나와 119에 신고를 하고도 다시 들어갔다 화를 당했다고 한다.

안씨의 희생으로 원룸 21개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병원 직원이 찍은 화상을 입은 안씨의 손 사진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화마가 엄습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각 방의 초인종을 누르고 뛰어 다녔을 의인의 상황이 그려진다.

안씨는 평소 봉사정신이 강했으며 장애시설에 다니며 불편한 사람들을 도왔다고 한다. “처음엔 죽은 아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잘했다 아들아!”라고 울먹이며 아들 친구들의 통곡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의연함이 더욱 안쓰럽게 와 닿는다.

지금 ‘초인종 의인(義人)’ 고 안치범씨의 의로움을 기리는 애도의 물결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목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한 젊은 의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한국의 미래를 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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