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중국의 세계적인 명감독 장예모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야제에서 세계를 놀랄만한 퍼포먼스, 군무(群舞)를 보여줬다. 지금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고대 복장을 한 소녀들이 지물(持物, 검 혹은 피리 등)을 들고 추는 느린 춤이었다. 음악에 맞춰 정연하게 움직이는 군무는 고대 춘추시대로 여행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대체 장 감독은 장중한 춤의 모티브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일설에는 그가 한국을 방문, 종묘제례악의 ‘일무(佾舞)’를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퍼포먼스의 소재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다. 일무는 고대 춤이다. 한 줄에 8명씩 모두 64명이 등장한다. 신라 화랑들이 왕 앞에서 연출했던 팔관회의 군무도 이런 모습이었을 게다. 일종의 율동을 중시하는 장중한 광장무(廣場舞)다.  

종묘제례악의 일무는 춘추(春秋), 논어(論語), 후한서(後漢書), 통전(通典), 송서(宋書) 등에도 기록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의식이 유교를 숭상한 명대까지 이어져 왔으나 청나라가 대륙을 점령한 후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청말 외세의 각축장이 되면서 한동안 명맥이 끊겼으며 문화혁명의 와중에서는 멸살위기까지 이르렀다. 

중국이 대륙의 빗장을 풀고 문화계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종묘제례악을 관람하고 충격을 받았다. ‘아! 이것은 우리에게 없어진 춘추시대의 음악이며 춤이구나.’ 그들은 종묘제례악의 자료를 엮어 재현하는 데 힘썼다. 애국심이 진한 장예모는 ‘일무’를 보고 2500년 춘추시대로의 부흥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우리 민족도 고대부터 광장에 모여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중국 기록인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마한(馬韓)조에도 ‘수십명이 단체가 되어 몸을 움직이는데 발 디디는 것이 다르고 손짓과 발짓이 장단에 맞추어 움직였다’고 돼 있다. 

신라 때 유행했던 처용무도 광장 춤이다. 이 행사에는 왕까지 나와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 장중한 수제천(壽齊天) 음악에 맞추어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밝고 번성한 태평성대 신라)”를 외치며 춤이 시작된다. 봉산탈춤, 강강수월래 등 여러 전통 민속춤도 마을 공터에서 사람들을 모아 공연된 것들이다.  

조선 중엽 중국에서 호무(胡舞)가 들여져와 이 춤이 양반사회까지 파급됐다.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르고 팔과 다리를 활발하게 움직였던 호무는 문자대로 북방 호족이 즐긴 춤이었다. 방안에서 책만을 읽었던 양반들이 이 춤에 열광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이 춤이 양반자제들에게 크게 유행하자 점잖지 못한 행동이라고 혀를 차는 선비들도 있었다.   

중국 대도시를 여행하다보면 아침부터 공원이나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광장무(廣場舞)’를 추는 모습을 발견한다. 베이징 번화가에는 소수민족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밤늦게까지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풍속도가 달라졌다. 젊은이들은 광장무를 시대착오적 노인들의 행태로 반대하면서 노소 세대 간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분위기다. 실지로 중국 난징(南京)에서는 광장무를 추는 중년들과 청년 간에 싸움이 벌어져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런 와중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한 알리바바 대표 마윈이 ‘광장무’에 일가견이 있는 노인을 간부로 채용, 고액 연봉을 주겠다고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50세만 돼도 등 떠밀려 나가는 세태에 노인들을 간부로 채용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마윈은 천재적 머리의 소유자이며 애국심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기업인이다. 마윈도 광장무를 통해 2500년 위대한 춘추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꿈을 꾼 것인가. 

우리에게는 멋지고 아름다운 광장무, ‘강강수월래’가 있다. 마을 여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군무하면서 외적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린 안보가(安保歌)가 아닌가. 항상 보수와 진보, 태극기와 촛불이 교대로 점거하는 격동의 광화문광장에 수만명이 참가하는 광장무, 강강수월래를 연출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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