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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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라는 한문소설은 한 총각과 시집가지 못한 채 죽은 처녀의 한을 그린 작품이다. ‘저포’란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다.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한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이 지었다.

만복사는 지금의 남원시에 있던 절이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 남은 여러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매우 번창했던 것 같다. 신라 다섯 소경(小京)의 하나인 남원소경 시기 경찰(京刹)이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 양생은 남원 양반가의 총각으로 만복사에서 공부할 때 비몽사몽간에 아름다운 처녀 귀신을 만난다. 죽은 처녀의 영혼이 그 한을 풀기 위해 배필을 찾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낭군을 만난 것이다.

처녀 귀신은 구애에 적극적이었으며 양생을 유혹해 꿈같은 신혼을 치른다. 시간이 흐르고 처녀귀신이 이별하면서 양생에게 슬픈 심경을 토로한다.

‘…(전략)… 마침 인연이 닿아서 당신을 만나게 되고, 제 정조를 바치고, 술도 빚고, 옷도 기우며 평생 지어미의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해져 있는 이별을 어찌할 수 없으니, 저는 꼭 저승으로 가야합니다. 이제 다시는 당신과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으니,… 이 슬픔을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 민속에 처녀 귀신은 혼례를 치르지 못해 저승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손각시’ ‘손말명’ ‘처녀귀신’ 혹은 ‘원혼여귀’라고도 불렸다. 처녀가 죽어 혼령이 손각시가 되는 걸 두려워해 매장할 때 남자의 옷을 입혀 거꾸로 묻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못다 푼 처녀의 한을 달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혼인은 인륜지 대사요, 만복(萬福)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양생의 꿈같은 처녀귀신과의 인륜대사가 그래서 만복사를 무대로 꾸며진 것인가. 좋은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르고 순풍 순풍 자식 많이 낳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긴 것이 우리 조상들이다.

고대 중국의 제왕들도 자식을 많이 낳아 잘 기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다. 한나라시대 거울이나 옥벽(玉壁)을 보면 ‘의자손(宜子孫)’이라는 글씨가 각자 된 것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자자손손의가의실(子子孙孙宜家宜室)’의 준말로 자손과 집안의 잘되는 것을 기원한 문구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청동으로 만든 의자손 명문 거울이 출토되기도 했다.

청나라 때 적호(翟灝)가 지은 백과사전 통속편(通俗編)에 나오는 오복은 수, 부, 귀, 강녕과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해 선행을 행함) 대신 ‘자손중다(子孫衆多)’를 포함시켰다. 착한 탓에 만복을 받은 고전속의 흥보는 자식들이 무려 20명으로 그려진다. 지금 세태는 한 가정에 한 명밖에 낳지 않을 뿐 아니라 결혼적령기가 돼도 시집 장가를 외면하고 있다.

중국에서 조차 나 홀로 세대가 1억명이 넘는다는 집계가 있다. 우리나라도 혼자 사는 집은 2000년 222만 가구였는데 지난해 600만 가구를 넘었다.

한해 혼자 살다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매년 1천명이나 된다. 젊은 세대가 늙은 나이가 되는 3~40년 후에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 될 듯하다.

홀로 늙는 세대가 천만명을 넘게 되면 한국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국가가 무슨 재주로 이 많은 고령인구 비용을 담당할 수 있을지. 손각시가 안 되려고 혼령이 되어서도 시집갈 것을 염원한 ‘만복사저포기’ 같은 세태가 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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