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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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개최에 경악한 고종은 즉시 견제에 나섰다. 3월 15일에 고종은 특명을 내려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이원긍, 여규형, 안기중 4명을 구속시켰다.

지석영(1855~1935)은 우리나라에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을 처음 보급한 사람이다. 그는 1883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해 우두를 보급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를 했다.

지석영은 1894년 7월 5일에 민씨 척족 실세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과 고종과 민왕후가 절대적으로 신임해 군(君)을 봉한 무당 진령군(眞靈君)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오늘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 병통이 있는데 하나는 원망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분개하는 마음입니다.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정사에 지쳐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쌓인 원망을 해소시킬 방법이 없으니 분노의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또한 백성의 마음에는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을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고치겠습니까? 원망하는 마음을 시원히 바꾸어야 만이 청나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일본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것입니다.

(중략)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해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동학 농민전쟁을 말함)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 민영준(당시 병조판서)과 신령의 힘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尙方劍)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고종실록 1894년 7월 5일)

지석영 등 4명이 구속되자 3월 20일에 독립협회는 경무사 김재풍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1)1897년 11월 2일에 반포한 법률 제11조 규정에는 사람을 체포할 때는 24시간 안에 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무청이 독립협회 회원 몇 명을 체포해 여러 날 구금하고도 재판소로 이송하지 않은 것은 법률 위반이다. (2)독립협회 회원이 왜 체포됐는지를 밝혀라”였다.

하지만 고종은 바로 조령(詔令)을 내려 이들을 10년 유배에 처하라고 명했다.

“지석영 등은 마음가짐이 음흉하고 행실이 비열하다. 제멋대로 유언비어를 만들고 인심을 선동해 현혹시켰으니, 법부(法部)로 하여금 유배 10년에 처하게 하라.”

고종은 소위 선동죄를 적용한 것이다. 이러자 법부는 재판도 없이 이원긍은 용천군 신도에, 여규형과 지석영은 풍천군 초도(椒島)에, 안기중은 장연군 백령도에 유배했다. (고종실록 1898년 3월 20일)

이러자 독립협회는 특별회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정부의 횡포를 거세게 규탄하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투쟁을 벌였다. 결국 6월 28일에 고종은 “유배된 죄인 지석영 등 4명을 모두 특별히 방송(放送)하라”고 명했다.

한편 고종과 수구파 정부는 ‘독립신문’ 주필이자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에 대한 추방 작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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