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not caption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싸움인 ‘0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을 대리해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한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1902년 1월에 영일동맹을 체결한 영국은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왔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의 진해만과 마산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결정했고, 6일에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메이지 천황은 육·해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6일 아침에 나가사키 근처의 사세보 군항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 제1전함대와 제2전함대가 중국 뤼순으로 출발했다. 연합함대 제3전함대와 제7전함대는 2월 6일 아침에 대마도의 다케시키 항을 출발해 저녁 무렵에 진해만을 점령했다. 이어서 육전대가 상륙해 마산의 전신국을 점령했다. 이것이 일본의 대한제국 첫 침략이었다(와다 하루키 저·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2011, p59~60).

먼저 러일전쟁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1900년에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났다. 의화단은 중국 산동지방에서 원나라 때부터 맥을 이어오던 백련교(白蓮敎) 계통의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병(神兵)이라 칭해 권법(拳法)과 봉술(棒術)을 익히고 주문을 외우면 비록 총탄이라도 피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도와 서양을 멸한다)’을 기치로 외국인에 대해 테러를 가하는 배외(排外) 운동을 전개했다.

1900년 6월 20일에 20만명의 의화단은 독일 공사 캐텔러를 살해하고 북경의 외국 공사관을 포위·공격했다. 6월 21일에 청나라는 열강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서태후는 “청국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믿을 것은 민심뿐이다”라고 말했다.

의화단의 외국 공사관 봉쇄는 55일간이나 계속됐다. 열강들은 영국 공사 맥도널드의 지휘하에 잘 버텼다. 이 사건은 ‘북경의 55일’이란 영화로도 제작됐다.

공사관이 포위되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일본, 이탈리아 등 8개국은 공동출병을 결의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각국의 출병은 쉽지 않았다. 영국은 40만명의 병력을 동원한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에 발이 묶였고, 미국은 필리핀 독립운동 진압에 매달려 있었다. 열강은 일본에 출병을 요청했다. 7월 6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모험”이라며 출병을 결정했다.

8월 14일의 북경 총공격에 참가한 연합군은 4만 7000명이었는데 일본군이 2만 2000명, 러시아군이 1만 374명이었다. 연합군 공격 직전에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西安)으로 도망쳤고, 북경은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서태후가 아끼던 여름 궁전 이화원도 파괴됐다.

가장 약탈이 심했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 캐텔러 공사가 피살돼 화가 난 독일 황제는 청나라를 야만국으로 취급하라는 훈령까지 내렸다.

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도 약탈행위를 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절도 있는 기율을 지켰고 서구 열강은 일본군을 ‘동양의 헌병’이라고 불렀다. 1901년 9월 7일 청나라 대표 이홍장과 영국·미국·러시아·독일·일본 등 11개국 대표 사이에 신축조약이 조인됐다. 천문학적 배상금으로 청나라 재정은 파탄지경이었고, 외국 군대가 상주해 중국은 반식민지화 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