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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64(영조 40)년 영조(英祖)는 동궁(東宮)을 이미 세상을 떠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입적(入籍)시켜 그의 대(代)를 잇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와 관련해 동궁이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됐으나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가 결국 당쟁의 희생양이 됐듯이 항상 생명의 위협을 안고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궁은 특히 인척(姻戚)이 되는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圖書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 문화(乾隆文化)를 연구하면서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다.

1775(영조 51)년 82세가 된 영조는 동궁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命)하였으나 이러한 조치에 대해 특히 동궁의 외숙부(外叔父)가 되는 홍인한(洪麟漢)이 반대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가 영조의 기력이 왕성하고 동궁이 어리니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 같은 경우 이미 15세에 대리청정을 했는데 당시 동궁의 연령은 24세의 청년이었으므로 홍인한의 반대 이유는 설득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궁은 소론 계열의 서명선(徐命善)에게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부탁했으며 이에 대하여 홍인한 또한 심상운(沈翔運)을 통한 반대 상소를 올리게 하면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긴박하게 전개됐다.

영조는 이러한 대립에 대해 결국 심상운을 귀양 보내고 홍인한의 관직을 삭탈하는 조치를 내린 이후 12월 7일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보게 한다는 영(令)을 내리고 경희궁(慶熙宮) 경현당(景賢堂)에서 대리청정 의식을 거행하면서 동궁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다.

노론은 이러한 영조의 조치에 대헤 반대하면서 동궁을 제거하려고 모의했지만 그 이듬해 3월에 영조가 집경당(集慶堂)에서 향년(享年) 83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한 이후 마침내 동궁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국에 일대 반전이 일어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출생했으나 생부가 뒤주 속에서 세상을 떠난 불행을 겪었으며 결국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는 우여곡절 속에서 조부(祖父) 영조의 강력한 후원(後援)이 하나의 버팀목이 돼 영조가 승하한 이후 1776(영조 52)년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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