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을미사변 전야
[역사이야기] 을미사변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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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이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시해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배후와 시해 과정·시해범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 데다가 일본이 사건을 철저히 인멸·왜곡했기 때문이다.

먼저 을미사변 전야부터 살펴보자. 1895년 2월 일본군이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까지 위협하자 청나라 조정은 급히 이홍장을 시모노세키로 파견했다. 이홍장은 요리 집 춘범루에서 이토 총리와 교섭에 들어갔다. 이홍장은 피격당하는 수모까지 겪어가면서 강화회담을 해 양력 4월 17일에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전문 11조로 된 조약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

2. 요동 반도·대만·팽호 열도를 할양한다.

3. 배상금으로 2억냥(일화 3억엔)을 7년 분할로 지불한다.

이러자 남하정책을 추진 중인 러시아가 독일·프랑스를 부추겨 4월 23일에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섰다. 삼국간섭이었다. 4월 29일에 일본은 3천만냥의 배상금을 받고 요동 반도를 반환 결정했다.

러시아의 기침 한 번에 일본이 독감에 걸린 것을 본 영악한 민왕후는 열강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고종 부부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을 멀리함)을 추진했다.

음력 5월 5일(이하 음력)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직하자 고종은 학부대신 박정양을 총리대신에, 이완용을 학부대신에 임용했다.

그런데 윤 5월 14일에 내부대신 박영효의 역모 사건이 터졌고,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6월 6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접견했다. 베베르는 고종에게 일본을 견제할 나라가 러시아임을 각인시켰다.

7월 3일에 고종은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민영순 민형식, 이용태, 김문현, 조병갑 등 279명을 사면했다. 고종, 너무 어이없다. 동학농민전쟁을 야기시킨 조병갑·이용태 등과 민영준 ·민형식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을 사면하다니.

7월 5일에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친미파 박정양을 내부대신에 친러파 이범진을 대신 서리(署理)에 임명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일공사로 보냈다. 7월 13일에 조선에 온 미우라는 전(前) 공사 이노우에와 함께 7월 15일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후 이노우에는 7월 29일까지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민왕후를 시해하는 ‘여우 사냥’ 작전을 꾸몄고, 미우라는 공관에 머물면서 참선에 몰두하는 척했다.

8월 16일에 내부 협판(차관) 유길준은 의주부 관찰사로 밀려났고, 8월 17일에 궁내부 협판 이범진이 농상공부 대신에 임용됐다. 바야흐로 친러파 세상이었다.

그런데 민씨 일파는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무청 순검(巡檢 경찰)을 이용했다. 이리하여 훈련대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해 양편에 사상자가 생겼다. 8월 19일에 군부대신 안경수는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의사를 고종의 밀지(密旨)로 미우라에게 가서 알렸고, 해산위기에 몰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일본 공사를 만나 분통을 터트렸다.

8월 19일 밤에 민왕후는 경복궁에서 궁내부 대신으로 내정된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에 대한 축하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몇 시간 안 돼 민왕후가 경복궁 침실에서 시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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