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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776년(영조 52)년 3월 10일 영조(英祖)에 이어서 제22대 임금으로 정조(正祖)가 즉위(卽位)했다.

이와 관련해 그 해에 미국이 독립했으며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國富論)’을 저술했으며 청나라는 42년째 건륭제(乾隆帝)가 재위(在位)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개혁군주(改革君主)로서의 면모(面貌)를 보여줬는데, 즉위한 이후 정조는 다음과 같은 유시(諭示)를 내렸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향사(享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 없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께도 고하겠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이후 동궁 시절 갖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都承旨)를 비롯하여 숙위대장(宿衛大將)과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겸임시키고 그로 하여금 궁중의 숙청을 맡게 하였다.

이와 관련해 홍국영은 모든 군국기무로부터 대각의 언론, 문무관의 인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면의 실권을 장악해 과감한 숙청을 감행하였는데, 구체적으로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을 비롯하여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和緩翁主), 숙의 문씨(淑儀文氏), 문성국(文聖國) 등을 숙청했다.

여기서 홍봉한(洪鳳漢) 같은 경우는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라는 점이 감안돼 정조는 그를 숙청해야 한다는 세간의 여론을 무마하고 숙청하지 않는 결단력을 보여줬다.

한편 숙청 작업을 주도하였던 홍국영의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이 대단하였으니 왕을 능가하는 권세 앞에 고관대착(高官大爵)들도 머리를 숙여야 하고 모든 인사권도 그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홍국영의 권세(權勢)도 그 도가 지나치게 되어 1778(정조 3)년 그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後宮)으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조정뿐만 아니라 궁궐 안에도 우군을 만들어 놓겠다는 그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며 더 나아가서 왕위계승 문제에도 관심을 보인 행동이라 할 수 있으나 원빈 홍씨(元嬪洪氏)가 1779(정조 4)년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홍국영이 정계를 은퇴하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원빈의 사망과 관련해 그가 정조의 왕비(王妃)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탄압한 것인데, 이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국영은 1779(정조 4)년 9월 정조에게 상소를 올려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그 이듬해, 강릉에서 33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일생(一生)을 마쳤다고 하니 이는 권력의 무상함을 엿보게 해 주는 하나의 사례(事例)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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