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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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기 사흘 전 서울 봉은사에 현판 하나를 써줬다. 바로 그 유명한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다. 왜 추사는 비로자나불상을 안치한 법당을 판전이라고 한 것일까.

법당은 나무로 짓는 것이 상례다. ‘넓은 나무집’이라는 뜻인데 굳이 어린아이 글씨 같은 필체로 이 두 글자를 세상에 선문답하듯이 남기고 간 것일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화두로 내놓은 것은 아닐까.

판교(板橋)는 우리말로 ‘널다리’란 뜻이다. ‘가는 다리’인 세교(細橋)와 반대되는 표현이다. 넓은 다리라는 뜻인데 전국에 판교라는 지명이 많다. 판교라는 동네 이름이 전 국민에게 회자 된 것은 성남시 판교일 것이다.

추사는 생전 ‘판교’를 아호로 쓴 청나라 화가 정섭(鄭燮, 1693~1765)을 흠모했다. 왜 추사는 정섭을 흠모한 것일까.

판교는 묵죽도(墨竹圖)의 대가였다. 예서, 해서를 섞은 독특한 서체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에 대한 식견도 당대 최고의 경지였다고 한다. 판교는 당나라 시인 두보를 존중했다. 또 평생 권세를 멀리하고 고고하게 살았다.

그림을 보면 대나무가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필자는 중국 베이징, 상해 미술관을 여행하는 길에 판교의 진적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추사가 그 풍모를 존경한 이유를 알게 됐다. 하늘 높이 치솟은 묵죽의 굳건함은 군자의 상징으로 판교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묵죽의 호방한 기개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선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판교는 ‘붓을 들기 전에 먼저 생각(意)을 가져야 뜻한 작품을 얻을 수 있다’는 지론을 폈다. 추사는 판교의 이런 자세를 흠모했다. 선생이 실현하려는 작품 속의 뜻(意)은 정섭의 방법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성남시 판교에는 옛부터 민속놀이가 전해 내려온다. 성남문화원이 매년 이를 재현, 페스티벌화 하고 있다. 인구 1백만 대도시여서 행사 규모도 크다. 천제(天祭)는 판교 마당바위에서 새해 첫 일출과 함께 열린다. 성남 시민들의 건강과·행복을 축원하는 의식이다.

요즈음 성남 판교 대장동 개발을 둘러싸고 국민들의 분노가 집중되고 있다. 판교 천신도 노했는가. 보전녹지였던 대장동을 파헤치고 무리하게 대단위 아파트를 건설해 판교 천신이 잔뜩 화가 난지도 모른다.

서민들은 죽어라 땀 흘려 일을 해도 기백만원 모으기도 힘이 드는 세상이다. 이들은 기백만을 투자해 수십억 혹은 수백억, 수천억원을 챙겼다고 한다. 성남시가 어떻게 특정인들의 야욕에 춤을 추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야당 국회의원 아들은 몇 년 일하고 퇴직금을 50억원이나 받았다.

이권을 획득한 무리들과 인허가 행정을 책임졌던 성남시의 의혹이 도마 위에 올라있다. 이재명 전 시장은 본인이 직접 대장동 개발의 기획자라고 천명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당 대권 경쟁에 나선 이 지사의 책임이 면책 될 수 없다.

대장동 핵심 인물들에 대한 검찰이 본격 수사에 나섰으나 봐주기 식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야당과 국민들은 특검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야 가릴 것 없이 관련자들은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추사의 ‘판전’은 허망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평생 군자의 도로 살다 간 ‘판교 정섭’의 고고했던 정신을 공직자들이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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