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8. 예수님은 왜 밤에 도둑같이 와서 깨어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가는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일이 잘못인가? 이 밤은 어떤 밤인가? 자는 자들은 밤에 잔다(살전 5장). 자는 자와 깨어 따라가는 자 중 누가 구원받을 자인가? 따라간 적이 있는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유럽에서 빌립보 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교회다(행 17:1-7). 그러나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갑작스럽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바울은 그곳에서 전도한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자 기록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 가운데 본 질문이 기록된 5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것’이란 표현은 하나의 비유다. 이와 병행을 이루는 마 24:42, 43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방심하지 말고 믿음생활에 전념해야 함을 교훈하고자 삼은 비유인 것이다. 때문에 3절에서는 비슷한 뜻으로 해산의 고통을 비유하기도 하였다. 해산의 고통이 예기치 않게 산모에게 닥쳐오듯이 주님의 오심이 그럴 것이란 뜻이다. 당시 제자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살아있을 때 주님이 오실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제자들이 오해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죽음을 죽게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을 때의 일이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 품에 의지한 제자에 대하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 21:21)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2)라고 답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란 말씀으로 이해하여(요 21:23) 주님이 그 시대에 재림하실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교훈에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일도하지 않고 주님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교회를 혼란케 했던 무리들이 있었다(살후 3:11). 그러므로 잘못된 재림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 다시 보낸 서신이 데살로니가후서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 역시 성경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심히 중요하다. 특히 종말론이나 주님 재림과 같은 문제는 더더욱 그러하다. 질문처럼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셔서 깨어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은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 역시 비유로서 항시 긴장된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것을 권고하고자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자는 자와 깨어 따라가는 자 중 누가 구원 받을 자인가?” 라는 질문이나 “따라간 적이 있는가?” 라는 질문 역시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던진 질문이다. 실제 주님이 오시는 때는 모든 인류가 주님 재림을 목격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 1:7; 마 24:26-30).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종말이란 인간의 인식으로 간파되는 것이 아니다. 종말이란 죄악된 자신이나 타인을 모델로 삼아 짐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육신과 그 사역으로 규정된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이미 종말이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대체 인간’의 등장 자체가 현 인간의 모든 행함은 소급해서 악마적으로 죄악된 것이라고 결정나버리는 것이다. 그 등장하신 분이 바로 ‘인자人子’이다. 이 ‘인자’라는 개념은 모든 언약을 완수한 사명이 담고 있다. 다니엘에서는 이 인자는 ‘지극히 높은 분의 보좌’에서 이 지상으로 투입되게 된다. 그래서 자기 딴에 철저하게 구약을 말씀으로 신봉한다는 유대 학자들에게 있어 메시아냐 아니냐를 ‘구름타고 올거야 아니냐’로 본 것이다(단 7:13).

자연 현상은 모든 게 말씀대로 움직이고 자기네들만큼은 이런 경지에서 말씀을 철석같이 믿기에 자연현상을 통해서 메시아됨을 파악하는데 자신감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관찰성 자체가 배후에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점을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지적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아니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그도 자부하기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다.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 바로 그런 해석 자체가 육에서 나왔기에 예수님을 육으로 해석한 것이다(고후 5:17).

늘 깨어있어 도둑이 오더라도 자신만큼은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의식에는 이런 바리새인적인 성경 해석이 깔려있다. 즉 ‘나만이라도 기어이 구원받고 말리라’는 정신이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예수님만의 구원’이다. 다른 사람은 애초부터 구원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언약완성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만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다른 사람은 아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자기 이름,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의 행함으로만 가능하기에 속속들이 구석구석 예수님의 행함만 남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한다.

바로 천국이란 이런 세계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이 일체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 기쁨과 즐거움과 찬양으로 참여만 할 뿐이다. 따라서 밤이든 도둑이든 이런 표현들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서 그 내막에 성도를 참여시킴으로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찬양케 한다. 성령님이 오심이 이로서 구원에 필수적이다. 성령님이 오신 사람은 날마다 자기 잘남 위주의 성경해석을 파기당하고 책망 받는 축복을 받게 된다. 깨어있음도 성도 본인의 능력으로서 불가능함을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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