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4. 재림 예수님은 언제, 어디의, 누구에게 오시며, 그 징조는 어떤 것이며, 오시는 그곳은 교단인가, 개인에게 오시는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알아”
누구나 재림의 광경 목격하게 돼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한 문제는 시대마다 교회들의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올바른 성경해석보다는 왜곡된 해석으로 인하여 많은 오류들이 있어왔다. 특히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그릇된 성경 인식은 큰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 하실 것인가의 문제는 성경이 너무나도 명료하게 밝혀주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주님 재림에 대한 사건은 밝혀주신 진리이지만 언제 오실 것인가의 문제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셨다. 따라서 그것이 언제이든 그 날과 시를 말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언급되고 있다. 교회의 타락(살후 2:3), 천재지변(눅 21:11), 인류사회 공동체의 붕궤(마 24:7) 등이 그것이다. 어디에 오실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6, 27)

주님의 재림은 지엽적(枝葉的)이거나 경역적(境域的)이지 않다. 그가 지구의 어느 편에 있든지, 아울러 그가 누구였든지 주님 재림의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그 역사의 실체를 체득(體得)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지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목격하게 되는 인류는 기쁨과 환영이란 측면 보다는 극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 날을 맞을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의 답변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시 지상에는 택한 백성들은 없고 구속사는 종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림 시와 관련하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주님 재림의 목적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에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 19장 15절에서는 주님 재림의 역사에 대하여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어느 교단이나 개인을 찾아오시는 것일 수 없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재림, 세상에 빠진 사람들 향한 경고
예수 십자가 의미 알려주려는 취지

‘예수님 오심’이라는 개념 자체는 인간들을 휘감고 있는 시간적, 공간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간들의 이성, 현재 자신의 관찰하고 있는 그 세계관을 중심으로 하기에 그 세계관 밖에는 하늘나라와 지옥이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그들이 구축한 세계관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자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징조’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요한은 다른 표현을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 혹은 ‘성령 안’이라고 한 표현이다. ‘예수 안’과 같은 표현이 ‘성령 안’이다. 여기서는 우리 인간들이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일소에 붙이고 언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신다’고 했을 때 그다음에 뒤따르는 보충 술어들이 바로 ‘어디에’ ‘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여기에 관심을 갖겠다는 다음과 같은 더러운 심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들추어내는 환경이 된다.

즉 “예수님, 저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있어요. 저 구원받고 싶어요. 하나님의 계시는 뭐든지 이해할 수가 있는데 저도 성령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저가 아직 모르는 게 있어도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강림은 믿지만 언제 오시는지 어디 오시는지 힌트라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 불쌍한 영혼들은 천국에 많이 모집하든데 보다 수월할 것 같아요. 천국에 많은 수를 여다 보내게 되면 하나님 나라도 확장되어 하나님도 좋고 우리도 좋아요 교회 부흥되니까 말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 할 것이다.

바로 이 사고방식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사고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또다시 못 박아 죽이는 짓의 되풀이가 된다. 그 이유는 천국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강림이란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한해서 적용되기에 ‘이미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갈 2:20)’ 사람에게는 십자가 작업이 세상에 최종 그 진가로서 죄악된 세계를 상대로 보여주는 사태임을 안다. 즉 이미 죄악된 세상이라는 점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종말 모드(mode)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를 종말 됨을 결정짓는 징조로 보는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는 곧 재림과 강림을 새삼스럽게 기다리는 그 자체가 불신세계가 조장한 종교적 아이디어이다. 실은 자가 속에서 ‘나는 구원될 자격도 입장도 못됩니다’를 파악한 자들에게 있어 재림과 강림조치란 그동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아이디어서 만들어낸 희망사항을 그런 식으로 왜곡함과 관련 있는 개념이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묵시적으로 대망했던 것처럼 말이다.

재림, 혹은 강림의 취지는 이 세상을 좋아하고 푹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의가 무엇인가를 새삼 늘 돌아보게 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4-35).”

사람이 세속에 푹 빠져 사는 것은 재림이나 강림의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당연히 세상 자체를 질적으로 달리 봐야 하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림으로 바로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 강림의 진정한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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