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14. 일곱 번째 나팔에 변화되어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은 육인가, 영인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이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성경에서 일곱 번째 나팔에 변화되어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나팔은 계시록의 3대 7중 역사 곧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가운데 일곱 번째 나팔로서 계시록 10:7과 11:15에서 나온다. 10:7은 천사가 요한에게 가르쳐 준 말씀이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되면 그동안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과 같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보도한 내용이다.

11:15절은 실제로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지는 상황에 대한 보도이다. 그런데 일곱 나팔 가운데 세 나팔 즉 다섯째와, 여섯째, 일곱째 나팔에 대해서는 계 8:13에서 화(禍), 화(禍), 화(禍)라고 말씀했다. 곧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은 마지막 심판의 역사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에는 다시 일곱 대접 재앙의 역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그리고 그 일곱 대접재앙과 관련된 내용은 16장에서 자세히 기술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모두 최종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일곱째 나팔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 대한 주제(主題)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즉 부활장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때문에 일곱 번째 나팔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부활은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끝난 이후 백보좌 심판 때라고 계 20:11~13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란 표현은 같은 성도라 하더라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영광이 다를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함이 이 말씀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죽지 않고 썩지 않을 것이 ‘육인가, 영인가?’의 질문에 관심을 두고 하신 교훈이 아닌 것이다.

문맥을 보면 이 말씀 바로 앞 절인 15:41에서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뒤를 이어 15:42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부활의 성향, 그 양태와 관련된 교훈이다.

그중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 등은 이 세상 것을 상징한 하나의 비유다. 반대로 썩지 않을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 등은 천국에서 받게 될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을 표현코자 한 은유(隱喩)다. 즉 부활의 영광은 이 땅의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됨을 말씀하고자함이 교훈의 핵심이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동일하게 구원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 영광은 다를 것이란 교훈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일곱째 나팔 때와 연관 해석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인간들은 자신의 구조를 따지면서 육+영(영혼)이라는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철학적이다. 성경에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것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인간들의 오고가는 그 언어 속에서도 죄가 담겨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그들의 언어를 같이 사용하시면서 그들이 짐작하고 있는 그 의미로서는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식으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용하신다.

인간의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속에는 근원적인 ‘구원욕망’이 발동되고 있다. 곧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영원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서 영생을 맛보겠다는 집념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22절에서 단호하게 차단시키는 의지를 나타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상 방문은 이러한 하나님 쪽의 의사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영생나무 과실을 먹을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탐내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제사를 통해서 (요즈음 식으로는 예배를 통해서) 신과 화해에 나선다. 이로서 가인은 자신의 행위가 죄악된 행위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는 자기가 보기에 뭐든지 정당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변명거리로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육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거부당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므로 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살해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유도하셨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할 수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죽음이 중요하다. 스스로 죽는 것은 소용없다.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결부된 그 죽음에 합류된 죽음이어야말로 육에서 영으로 전환되는 혜택을 받게 된다. 바로 그 희생의 노선을 따라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영이란 육을 충분히 육이라고 규정하는 식으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육에서 추구하는 그 영마저 육의 일부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육이 영을 추구하는 것도 역시 죄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노선이 어떤 특징이 외부에 나타내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곧 세상을 악하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희생당하는 일생을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그 당시 유대인들도 육으로 죽어 영으로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악하다고 단정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나고 악함으로 결론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과 활동은 세상 자체가 악함을 증거하기 위함이요 그 증거로 인하여 예수님 스스로 죽는 일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 7~18)’

이 죽음만이 영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성도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 성도가 기대하는 영은 영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배성이 곧 영이다. 성도의 변화된 몸은 기존의 육도 아니요 영도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진 낯선 몸이다. 시집도 장가도 갈 필요 없는 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일곱 봉인을 개봉 후 일곱 나팔의 심판이 시작 된다(계 8~10장). 일곱 나팔 안에 일곱 천사의 소리(나팔)가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은 일곱 천사의 소리 중 일곱 번째의 소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겠지만 성경을 보면서 젖을 먹는 사람도 있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다. 오늘 우리가 깨달은 것을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월권하여 풀어 가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님께서 성경을 때마다 열어 주실 것을 믿는다. ‘마지막 나팔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러하리라.(이는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어나게 되고 우리도 변화 받게 되기 때문이요(고전 15:52, kjv)’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 즉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썩어지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 받을 수 없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어지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 받을 수 없느니라(고전 15:50)’

지금 입고 있는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다면 죽은 자들의 몸도 썩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의 몸은 썩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천사장의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로부터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과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니,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썩지 않고 죽지 아니한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리라. ‘그 후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뵙게 되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의 영은 썩지도 죽지 아니할 것이다. 살과 피는 썩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죄의 피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었다고 하지만 살이 썩지 않는 것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피가 썩으면 사람의 살도 썩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비를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신비를 알게 하느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우리가 모두 변화 될 것이니(고전 15:51)’

아담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속한 그 분과 같으리라. 예수그리스도가 하늘에 속한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또한 변화 될 것이다.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도 지니게 되리라(고전 15:49)’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